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12.27 20:43 수정 : 2013.12.30 15:54

2013년 한 해는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 대선개입 논란으로 뜨거웠다.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김하영(왼쪽)씨와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모습.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댓통령에서 불통령까지 소설로 꾸며본 2013년

▶ 2013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올 한 해 내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 대선개입 논란은 조금도 잦아들 줄 모르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국정원 등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대선 1주년을 맞은 지난 18일 박 대통령의 이런 리더십을 가리켜 ‘자랑스러운 불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013년 ‘불통 공화국’을 짧은 소설 형식으로 정리해봤습니다.

30대 중후반의 남자는 나무로 만든 묵직한 카페 출입문을 밀고 들어온 뒤 고개를 양옆으로 한번씩 휙휙 돌렸다. 입구의 대각선 모퉁이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한 남자는 마치 오래된 한국 영화의 주인공처럼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내린 뒤 거침없이 다가가 앉았다.

“야, 생각보다 미인이시네요. 제가 최근 만난 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아, 이런 자리에 자주 나온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제가 상대하는 여자라고는 대부분 성별만 여자인 아줌마나 애들뿐이라서요. 오랜만에 이런 미녀 앞에 이렇게 단둘이 앉아 있으니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 형님이 그쪽 소개해주면서 좋은 분이라고 깍듯이 모시라고 하던데 이렇게 예쁜 분인 줄 알았으면 더 품격 있는 곳으로 모실걸 그랬어요. 으하하하, 농담입니다.”

다른 테이블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몇몇 젊은 여성이 힐끗 남자를 쳐다봤다. 여자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이라는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남자의 첫인사에 여자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했던 카페 안에 남자의 과장된 웃음소리만 둥둥 떠다녔다. 그사이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아르바이트 여성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아, 주문. 여기 간단한 브런치도 되긴 하는데. 그래봐야 샌드위치나 와플과 베이컨 뭐 이런 시시한 음식들이에요. 여기서는 그냥 차 한 잔 마시면서 시간 좀 죽이다가, 점심은 이 근처에 제가 잘 아는 고품격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서 먹죠. 원래 예약 안 하면 못 가는 곳인데 제가 레스토랑 사장을 잘 알아서 상관없어요. 아직 배는 안 고프시잖아요. 커피 드실 거죠?”

남자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여자의 동의를 구했다. 토요일 낮 1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앳된 얼굴의 아르바이트 여성이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졸지에 저품격 브런치 나부랭이나 파는 카페 종업원으로 전락한 것이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탁자 위에 놓인 메뉴판에 눈길을 한번 준 뒤 그냥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했다.

“아메리카노? 정말로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메리카노 같은 거 안 마시는데. 아시다시피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거잖아요.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에 진출한 미군 병사들이 에스프레소는 너무 진하니까 여기에 끓는 물을 섞어 마시기 시작했어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볼 때는 되게 촌스러운 거죠. 그때 미국인이 마시는 커피라는 뜻에서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을 붙여줬어요. 아참, 지난여름 호주 멜버른으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거기 사람들은 아메리카노를 ‘롱블랙’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에스프레소는 ‘쇼트블랙’. 어쨌든 멀쩡한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면 당연히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이 달아나버리는 거라 아메리카노는 좋지 않아요. 핸드드립으로 드시죠. 뭐, 아메리카노와 비슷한 거라고 보시면 돼요. 핸드드립으로 두 잔 주세요.”

여전히 억울한 표정의 아르바이트 여성이 다시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떤…, 핸드드립에도 종류가 많아서….”

“아, 그렇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이거. 에티오피아 커피 괜찮으시죠?”

남자는 나무 재질의 메뉴판을 들어 핸드드립 항목의 가장 첫 줄에 있던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 아래위로 한번 흔들었다. 아르바이트 여성이 등을 돌려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잠시 둥글게 오므렸던 남자는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를 발견한 남자는
거침없이 다가가 앉았다
“이렇게 예쁜 분인 줄 알았으면
더 품격있는 곳으로 모실걸”
여자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제가 갖고 있는 오피스텔이
역삼초등학교 앞에 있어요
왜 그때 국정원 여직원이
감금됐던 곳 있잖아요”
여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요즘 이렇게 아르바이트 써서 장사하기 참 힘들어요. 아, 제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이야기 좀 들으셨죠. 어디 내놓을 만한 직업은 아니고 딱히 이걸 직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부동산 임대업을 좀 하고 있습니다. 오피스텔 한 열 채 세놓고 있고, 상가도 좀 있고요. 대학 졸업한 뒤 몇 푼 안 되는 월급 받자고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하는 게 참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 한번은 취업했다가 며칠 나가고 그만두니까 아버지가 보기에 한심했는지 그냥 다 때려치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가 넘겨준 게 당신이 분양하고 남은 주상복합 건물 오피스텔 열 채였어요. 말도 마세요. 세입자 드나들 때 일일이 챙겨야 하고 이런저런 하자 생기면 보수해줘야 하고, 그 일이 또 만만치 않아요. 그래도 오피스텔이야 다들 어지간하면 기본 계약기간인 1년 주기로 움직이니까 괜찮은데, 상가는 정말 머리 아파요. 장사 안된다면 나가겠다고 해서 골치, 장사 잘되면 나갈 때 영업권 보상해달라 어쩐다 해서 골치죠. 장사 좀 해먹다가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돈 들여서 설비공사 해놓고 그 돈 보상해달라는 넋빠진 사람도 있어요. 처음에는 좋게 이야기해보다가 정 안되면 상가계약서 들이미는 수밖에 없죠. 얼마 전에는 장사 좀 배워볼까 싶어서 신림동에 있는 아버지 건물 1층에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가맹점을 하나 열어봤어요. 장사를 직접 해보니까 아, 사람 부리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하하하.”

아르바이트 여성이 잔을 가득 채운 커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가져왔다. 남자는 조심스레 커피잔을 내려놓는 아르바이트 여성의 얼굴을 계속 빤히 쳐다봤다.

“처음에는 매달 월급날 그 전날 일한 것까지 계산해서 줬어요. 젠장. 그랬더니 한 놈은 월급 받은 그 다음날 문자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나오겠다는 거예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 다행히 그 전에 일했던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연락해서 하루 2만원씩 더 주기로 하고 겨우 며칠 땜빵했죠. 그때 배운 노하우가 바로 받을 돈은 최대한 빨리 받고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다음부터 전달치 월급을 항상 그 다음달 25일에 줬어요. 11월 한달 동안 일했다면, 해당 월급을 다음달인 12월25일에 주는 식이죠. 그렇게라도 묶어놔야 애들이 사장 무서운 줄 안다니까요.”

창밖을 바라보던 여자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남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의 눈길을 맞닥뜨리자 남자는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역삼동 사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갖고 있는 오피스텔이 거기 역삼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어요. 성우스타우스 오피스텔이라고 들어보셨죠. 지난해 대통령선거 직전 티브이에도 많이 나오고 그래서 좀 유명해졌거든요. 왜 그때 국정원 여직원이 오피스텔 얻어놓고 인터넷 댓글인지 뭔지 달다가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들켜 감금당했던 곳 있잖아요. 사실 국회의원보다 기자들이 더 많기는 하더만. 물론 저도 처음에 임대 줄 때는 몰랐어요. 나처럼 임대업 하는 사람들은 계약·관리 업무를 부동산업체에 모두 맡기니까, 이사 들어오는 날 잠깐 보거나 말거나 그래요. 그 607호 살던 김하영이라는 친구도 나는 얼굴을 못 봤어요. 입주하는 날 귀찮아서 그냥 부동산에 맡겨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얼굴 좀 봐둘걸 그랬다 싶어요. 언론에 잠깐 나오는 모습을 보니까 딱 내 스타일이던데, 으하하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의 오피스텔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건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티스푼으로 커피잔을 아주 천천히 저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혀를 쑤욱 빼어물며 입술에 침을 한번 발랐다.

“그거 아세요? 오피스텔이란 곳이 말이죠, 참 재밌는 장소예요. 그 오피스텔만 해도 규모는 한 400가구나 될까.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일반 아파트라면 식구 수만 다르지 그 안에서 밥 해먹고 빨래하고 똥 싸고 티브이 보는 건 똑같잖아요. 밖에서는 고상한 척해도 다들 비슷비슷하게 사는 거니까. 그런데 오피스텔이란 곳은요, 말 그대로 오피스 곧 사무실로 쓰는 사람들이 있고, 근처 회사에 다니며 잠만 거기서 자는 직장인도 있고, 신혼살림을 차린 젊은 커플도 있고 말이죠. 400개의 각기 다른 세계가 한 건물에 모여 있는 거라니까요. 아, 그 국정원 여직원처럼 댓글 쓰는 사람도 있고요. 물론 지금도 그 오피스텔 어딘가에서는 그런 은밀한 공작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국가로부터 월급 받고 인터넷 댓글 달아주는 국정원 요원. 캬, 나는 누가 그런 일 좀 안 시켜주나. 안 들키고 잘할 자신 있는데, 으하하하.”

혼자 신나게 떠들던 사내는 입을 축이려는 듯 커피잔을 들었다. 남자가 내는 후루룩 소리에 여자의 왼쪽 눈썹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여자가 커피 대신 레몬 슬라이스 한 조각이 둥둥 뜬 물을 한모금 마셨다. 남자는 곧바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저는요.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 참 문제가 많은 작자들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다시 깨달았어요. 작년 이맘때 우리 오피스텔 몰려가서 소란 피울 때도 사실 알아봤지만,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잖아요. 국가기관 대선개입인지 뭔지. 국정원이라는 곳이 원래 일반인에게는 공개가 안 되는 일 많이 하는 곳이에요. 아니 그걸 모르나? 그러니까 우리 오피스텔처럼 강남대로 이면에 자리잡은 조용한 곳에 비밀 사무실을 내는 거잖아요. 나중에 보니 김하영이라는 친구는 국정원 심리전단 3팀 소속이었더만요. 그 3팀이 블로그나 ‘오늘의 유머’ 같은 온라인 사이트를 주로 담당했다는 거예요. 네이버나 다음 이런 데는 2팀이, 트위터는 5팀이라는 데서 각각 맡았다는데 이게 지금 다 알려져 버렸어요. 정보기관이라면 비밀유지가 가장 중요한 건데 이런 식으로 다 까발리면 그냥 X 되는 거죠. 크흐흐흠.”

한참 동안 혼자 떠들던 남자는 목이 잠기는지 여자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부터 가래를 뽑아냈다. 여자는 남자가 하는 짓을 보며 순간적으로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으나 이내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북한군 사이버 관련 부대원 수가 3000명이라는 겁니다. 그놈들이 우리 쪽 금융기관이나 공공기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이나 해킹으로 피해를 입히는 죽일 놈들인데, 우리는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 70여명을 다 포함해도 고작 400명이라고요.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인원으로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아주 작은 실수는 좀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그렇게 보는 거예요. 결국 그 작은 개인적 일탈 때문에 지금 국가기관 대선개입이라고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참나, 부정선거는 개뿔. 중요한 건 그 일이 벌어진 게 이명박 때였다는 사실! 그 책임자들도 모두 이명박이 임명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아니, 이명박이 제멋대로 벌인 일을 지금 와서 어쩔 건데. 이걸 지금 박근혜에게 다 책임지라는 건 좀 심한 거죠. 박근혜 대통령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무슨 신부, 노조, 야당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무조건 대통령 퇴진해라, 특검해라. 아이고, 참나.”

여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여자는 맞은편 남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표정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에는 더이상 손대지 않았다. 그사이 아르바이트 여성이 다가와 두 사람의 물컵에 다시 물을 채웠다. 남자는 물이 채워지자마자 3분의 1쯤을 다시 들이켰다.

“그놈의 국가기관 대선개입, 정확히 말하면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이죠. 이 의혹 때문에 지금 원세훈하고, 전에 국정원장 했던 양반 알죠? 그리고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김용판, 두 사람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요. 아직 1심도 다 안 끝났는데 취임한 지 1년이 채 안 되는 대통령을 저렇게 들들 볶는다? 양심이 없는 인간들인 거예요, 양심이.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고 들어보셨죠. 프랑스 시민혁명의 산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근거로 하는 바로 그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현행범으로 체포되거나 구속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원으로부터 형을 확정받기 전까지는 죄인 취급 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법원도 그래요. 두 사람은 어쨌든 정권에 충성한 사람들 아니냐 말이죠. 그 사람들이 무슨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원래 공무원이란 게 그런 사람들인 거잖아요. 위에서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고. 그랬으면 아무리 야당이라도 일단 차분히 재판 결과 나오는 것 보고 비판을 해도 늦지 않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이면 국모 아니에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어디 국모에게 퇴진해라 마라. 이건 패륜이에요, 패륜.”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고. 그 대목에서 여자의 눈빛은 파르르 떨렸다. 여자는 더이상 남자가 내뱉는 말에 대꾸를 하거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식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그런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교사도 교육공무원이니 저보다 잘 아시겠네요. 그런데 혹시 전교조 뭐 이런 건가? 그건 아니죠? 박근혜 대통령이 전교조 불법화 한 건 아주 잘한 거예요. 전교조와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면 해당 교사를 징계한다 어쩐다 정도였는데, 그렇게 어설프게 대응하면 안 되거든요. 저는 예전에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전교조에 대해 해충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아 이 여자가 전교조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소나무 재선충이라고 들어보셨죠. 솔수염하늘소라는 곤충에 기생하는 해충인데 이게 일단 소나무에 한번 침투하면 산 전체를 그~냥 아작 내는 거예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재선충 한쌍이 일단 소나무 속으로 들어가면 딱 20일 만에 20만마리로 번식해요. 엄청난 거죠. 이렇게 퍼지기 시작하면 사람 몸으로 치면 혈관이라 할 수 있는 수액 통로마다 기어들어가서 나무 조직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데, 감염 6일이 지나면 빳빳하던 소나무 잎이 축 늘어지고 20일이 지나면 잎이 시든다고 하더라고요. 한달이면 잎이 붉게 변하면서 말라 죽는 거죠. 항공사진을 보면 재선충병에 걸린 소나무는 푸른 게 아니라 산이 온통 붉게 변해 있어요. 일본 소나무는 전멸 위기라고 하잖아요. 그게 재선충병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는 전교조 교사 한명이 재선충 한마리와 비슷하다고 봐요. 일단 학교에 한명이 들어가면 우선 동료 교사를 오염시키고 그다음에 학생들을 천천히 물들이는 거죠.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가 아니라 우리 학교 빨갛게~ 빨갛게. 참교육이다 뭐다 하면서 애들에게 인권, 민주화 뭐 이런 것만 가르친다는 거죠. 빨간 물은 어렸을 때부터 쪽쪽 빼야 애들이 커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있는데, 전교조 불법화 한 건 아주 잘한 거예요.”

여자가 짧고 여린 코웃음 소리를 토해냈다. 남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의 두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남자가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틈을 이용해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후 2시가 넘어가면서 카페를 찾는 손님도 한풀 꺾였다. 남자가 잽싸게 커피 리필을 요청했다. 아르바이트 여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리필은 아메리카노로밖에 안 된다고 전했다. 남자는 좋다고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양옆으로 한번 가로저으며 괜찮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내가 딱 보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만 괴롭히지 않으면 정치를 잘할 스타일이야. 자꾸 야당과 언론이 불통이다 독재다 하는데, 흥.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하려면, 우리 어디 한번 솔직히 말해봅시다. 야당 말 듣고 언론이 까는 거에 귀 기울이고, 하하 말은 좋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요. 야당과 언론은 암탉! 대통령은 닭 중의 닭 장닭! 나라 꼴이 제대로 갖춰지려면 장닭이 볏 멋들어지게 세운 채 중심을 잡아야죠. 그러려면 박 대통령보다 그 주변에 있는 참모와 여당, 국정원, 검찰, 법원 이런 데가 좀 받쳐줘야 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더라고. 그 빌어먹을 빨갱이 새끼, 이석긴가 그놈 내란음모 사건 재판하는 거 보니까 국정원이나 검찰이나 무슨 일을 그렇게 꾸몄는지 재판 때마다 엉망이야. 이석기나 통합진보당도 그래. 검찰이 기소했으면 아무 혐의도 없는 걸로 했겠어요. 이 정도로 빨갱이라는 게 입증됐으면 국회의원직 사퇴하고 당 해체하는 게 맞아요. 대법원까지 가서 확정판결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 국회의원 임기 다 끝날 때까지 버티겠다는 거지. 그놈의 무죄 추정의 원칙은 젠장.”

“국가기관 대선개입인지 뭔지
1심도 다 안 끝났는데
대통령을 들들 볶는다?
대통령이면 국모 아니에요?”
여자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박근혜가 정치 잘하고 있어요
대선개입 문제 잘 관리하면서
종북세력도 많이 솎아냈잖아요”
여자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남자는 어느새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내뱉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팔짱을 반만 푼 채 한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하하하하. 제가 오늘 이렇게 처음 만나자마자 너무 시사적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요. 제가 박근혜 대통령 같은 스타일을 좀 좋아해서 그래요. 저는 그렇게 말이 없는 여자, 고독한 여자 스타일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쪽도 이미지가 약간 비슷하신 거 같은데. 그래도 나는요, 야당과 언론이 국가기관 대선개입이다, 종북몰이다 아무리 이렇게 짖어대도 박근혜가 정치 하나는 잘하고 있다고 봐요. 대선개입 문제는 그것대로 잘 관리하면서 1년 동안 종북세력도 많이 솎아냈잖아요. 전교조도 그렇고 전공노도 수사하게 하고, 철도노조 파업하는 놈들에게도 공권력의 쓴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고. 그사이 복지니 뭐니 쓸데없는 데 신경쓰지 않고 국가 안보 튼튼히 다진 것도 높이 쳐줘야지. 올 한 해는 워낙 극성맞은 냄비들 때문에 좀 시끄러웠지만 내년 한 해는 분명 박근혜의 한 해가 될 거다~ 나는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내년 2월 이제 러시아 소치동계올림픽도 있고 여름에 브라질월드컵도 있고 하니까 올해처럼 정치에 관심 쏟을 일도 없을 거고. 지방선거만 잘 넘기면 잘할 거 같아요, 하하.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스마트폰을 보던데 내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없으신가.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가족이나 친구끼리 대화가 크게 줄었다고 하더니. 소통을 위해 탄생한 문명의 이기가 되레 불통을 빚어내고 있다는…”

마침내 여자가 탁자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네, 좋은 말씀 듣는 건 이 정도 해야겠네요. 제가 원해서 이뤄진 만남은 아니었어도 어차피 정해진 약속이니 웬만하면 맞춰드리고 싶었는데,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제가 오후에 어디를 좀 가봐야 해서 말씀하신 점심은 같이 못 하겠네요. 오늘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분께는 좋은 분 만나서 즐거운 시간 갖고 왔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여자가 일어서며 옆 의자에 걸쳐놓았던 카멜색 코트를 집어들 때 남자가 황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레스토랑에서 점심이라도 같이….”

여자는 대답 대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머지 목도리, 장갑을 챙겨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뭔가를 말하려다 참는 눈치였다. 카페 안에 그녀의 하이힐이 빚어내는 또각또각 소리가 맑게 울려퍼졌다. 카페문을 열고 나선 여자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며 차가운 공기를 한껏 빨아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카페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토해냈다.

“하아, 됐다 이 새끼야. 너나 많이 처먹어라. 고품격으로.”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2013년 한 해를 ‘불통’이라는 열쇳말로 정리한 이 글의 이야기 틀은 소설가 성석제씨의 단편소설 <이 인간이 정말>(2013년)로부터 ‘허락 없이’ 빌려왔다는 사실을 밝혀둡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커버스토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