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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04 11:20 수정 : 2016.03.04 18:31

정치BAR_이승준의 핑퐁_감동적인 ‘패배’도 있다
‘패전 처리’ 그리고 필리버스터

필리버스터 마지막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수정을 요구하는 12시간 31분의 무제한 토론을 마친 뒤 테러법 처지 저지에 실패했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왼쪽사진) 연합뉴스,2008년 6월19일 오후 대전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이글스 대 롯데자이언츠 경기중 9대8로 역전승을 거둔 한화선수들이 경기종료 후 자축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오른쪽 사진)

“지더라도 납득할 만한 패배가 되어야 한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귀에 익숙한 말입니다. 경기에 지고 난 뒤 팀의 감독, 팬들 가릴것 없이 자주 하는 말이죠. 승패가 중요한 스포츠에서 “지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간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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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처리의 딜레마

팀의 감독 입장에서는 ‘패전 처리’를 잘해야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쪼개 야구장으로 달려온 팬들은 응원하는 팀이 지더라도 잘 져야 ‘직관’한 보람이 있습니다.

특히 프로야구에서 패전 처리는 중요합니다. 9회까지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 프로야구의 특성상 3회~5회 사이 점수차가 벌어져 승부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콜드게임’이나 ‘몰수패’가 없다보니 역전의 가능성이 없더라도 9회까지 경기를 이어가야 합니다. 감독이나 선수, 팬 모두에게 괴로운 시간입니다.

이때 감독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일단 패전 처리를 잘하려면 일단 더이상 실점하지 않고, 승패와 상관없더라도 점수를 낼 수 있을 때 1점이라도 따라붙어야 합니다. 프로야구 시즌은 같은 팀과 세번 붙는 3연전이 반복됩니다. 무기력한 경기로 실점을 계속해 참패할 경우 다음날 경기에 임하는 팀의 사기가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또 1점이라도 따라붙어야 상대 투수들을 소모시킬수 있습니다. 큰 점수차로 앞서는 상대팀 감독은 다음 경기를 위해 주전급 투수보다 신인이나 백업 투수를 마운드에 올릴 것입니다. 지더라도 집요하게 공략해서 다음날 나올 불펜 투수 한명이라도 마운드로 끌어내는 것은 다음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감독은 이때 가능성 있는 신인이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투수들을 패전 처리 투수(삼미슈퍼스타즈의 감사용 선수가 대표적인 패전처리 투수죠)로 마운드에 올리고 실점 없이 남은 경기를 끝내길 바랍니다. 패전 처리 투수라고 마운드에서 긴장을 풀 수 없습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패전 처리 투수가 마운드에서 잘 버티고 있으면 팀에게 기회는 오기 때문입니다. 상대팀이 긴장을 풀고 방심하거나, 타자들의 방망이가 터져 상대를 추격하거나 역전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작은 가능성을 위해 불펜에서 대기 중인 승리조 투수들 역시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경우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다고 안심하던 상대팀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팬의 입장에서도 응원하는 팀이 승부가 기울었다고 수비수들은 실책을 남발하고, 투수들은 무너지고, 타자들의 방망이가 허공만 가른다면 경기를 보는 맛이 뚝 떨어질 것입니다.

최근 몇년간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며 하위권에 머물던 프로야구팀 한화이글스가 2015년 시즌 한때 팬들로부터 ‘마리한화(마리화나와 한화의 합성어. 한화이글스에 중독됐다는 의미로 쓰임)’라는 별명을 얻게된 것도 경기 막바지까지 상대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독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좋은 패배’를 하겠다고 필요이상의 전력을 소모하며 지는 경기에 ‘올인’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답은 없습니다. 다음 경기를 고려해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아끼고, 백업 선수들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매경기 총력전을 치른 김성근 감독의 ‘마리한화’가 후반기 ‘선수 혹사’ 논란에 시달리며 하위권으로 시즌을 마감한 것에 대해 팀 운영 전략의 실패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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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패전처리,필리버스터

필리버스터 마지막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3월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수정을 요구하는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위한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보며 야구경기의 패전 처리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의 저항은 사실상 패배가 예상된 싸움이었습니다. 2월 임시국회 마지막날인 3월10일까지 무제한 토론을 이어가서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처리를 막더라도, 국회의장과 새누리당이 다시 임시국회를 열어 처리하면 어쩔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필리버스터를 시작할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국회법상 정부여당의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단이 없는 더불어민주당에게 필리버스터는 ‘궁여지책’에 가까웠습니다. 경기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 패전처리 투수를 마운드에 올린 거죠.

그런데 패전처리 투수가 너무나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본회의장 연단에서 버텼습니다. 테러방지법의 폐해를 국민들에게 알리며 야당이 득점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 이긴 경기를 추격당한 새누리당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박근혜정부 들어 야당은 경기 초반 대량실점하는 야구팀처럼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입법부를 사실상 무시하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야당은 경기다운 경기를 펼치지 못했죠. 정부의 누리과정(3~5살 무상보육) 예산 지자체 떠넘기기, 입법부를 무릎 꿇린 국회법 개정안 논란(모법을 흔드는 시행령 논란) 등에서 야당은 3회를 넘기기 전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를 통해 끝까지 정부여당을 물고넘어지자, 팬들도 ‘마리한화’에 열광하듯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정부 들어 거의 처음으로 야당이 ‘납득할 수 있는 패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거죠.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둘째)가 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야권통합을 공식 제안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런데 팀의 감독인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는 다음 경기를 위해 갑자기 ‘경기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29일에서 1일로 넘어가는 늦은밤 필리버스터 중단 입장을 비쳤습니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보던 지지층들의 반발이 터져나왔습니다. 과거의 무기력한 모습을 또 재현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그동안 유권자와 지지층이 야당에게 등을 돌린 것은 야당의 선명성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신뢰’가 부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더민주가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중도층 유권자들이 야당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 일관성없이 우왕좌왕하는 당의 행태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9일 동안 테러방지법과 ‘무소불위’ 국정원의 문제점에 대해 피를 토하다가 갑자기 “선거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정당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패전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음 경기까지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콩가루’ 지경에 이른 더민주는 12시간31분간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이종걸 원내대표의 투혼으로 겨우 팀의 사기를 회복하고 팬들을 설득하며 경기를 마무리 했습니다.

물론 김종인 대표와 비상대책위원들의 입장도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많습니다. 어차피 진 경기에 전력을 소모하지 말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김종인 대표는 자신이 아끼고 믿는 ‘경제 민주화’란 선발투수로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실정을 심판하고 싶어합니다. 또 ‘야권통합’이란, 다음 경기에 구사할 ‘작전’도 준비한 상태였습니다. 보수언론이 “발목잡는 야당”이란 프레임을 씌울 준비도 마친 상태에 빨리 다음 경기 준비를 하는 게 낫다는 판단도 작용했습니다.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결국 4.13총선 결과가 말해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납득할수 없는 패배’를 계속하는 정당에게 팬들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47년만에 이뤄진 이번 필리버스터가 야당에게 ‘납득할 만한 패배’의 가치를 일깨우는 교훈이 됐을지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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