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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11 17:21 수정 : 2016.10.11 19:24

고명섭
논설위원

1999년 3월 초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대통령 김대중을 방문했다. 페리는 ‘포용정책을 위한 포괄적 접근 방안’이라는 제목의 차트를 펼쳐 들고 1시간30분 동안 자신의 대북정책 구상을 설명했다. 페리는 미국의 대북정책 대안으로 ‘현상 유지’, ‘체제 전복’ 그리고 ‘상호 위협 감소를 위한 협상’을 열거하고 그 가운데 ‘협상’을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포괄적 대화를 북한에 제의해야 하며 북한 핵·미사일 위협의 감소와 함께 대북 경제제재를 풀고 적대관계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 구상의 요지였다. ‘페리 프로세스’가 처음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페리가 처음부터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페리는 국방부 장관 시절인 1994년 봄 ‘제1차 북한 핵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전면전을 감수하고 영변 핵시설을 공격해야 한다는 ‘북폭론’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클린턴이 1998년 11월 페리를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한 것도 공화당이 지배하는 미국 의회가 페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경론자가 북한정책 책임자가 됐으니 김대중 정부로서는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동원이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 전략’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임동원이 제출한 전략의 핵심은 이러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의 동기는 한반도 냉전 구조에 기인한다. 한반도 냉전 구조를 해체하려면 남과 북이 화해해야 하며 미국·일본이 북한과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관계 정상화를 이뤄야 한다.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하고 북한이 위협을 느끼는 한 북한은 대량파괴무기 개발의 유혹에서 헤어나기 어렵다.’(임동원 <피스 메이커>) 김대중은 임동원이 자기 생각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해 12월7일 페리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김대중은 한 시간 넘게 페리를 설득했다. 페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속마음을 알 길 없었던 김대중은 임동원을 특사로 임명해 미국으로 보냈다. 임동원은 1999년 1월 페리를 만나 대북 포용정책을 설명했다. 후에 페리는 임동원의 설명을 듣고 “내 생각과 너무도 달라 어안이 벙벙했다”고 실토했다. 이 설득으로 페리는 김대중 정부의 구상을 받아들였고 3월 청와대 방문 때 자신의 구상을 내놓은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부끄럽지만 임동원 수석의 전략 구상을 도용하고 표절하여 미국식 표현으로 재구성한 데 불과하다.” 페리의 보고서는 미국 의회에 제출돼 1999년 9월 공개됐다. 이 보고서에 적시된 로드맵이 ‘페리 프로세스’이며 내용을 보면 사실상 ‘임동원 프로세스’다.

1999년 5월25일 핵 협상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윌리엄 페리(왼쪽에서 두번째) 당시 미국 대북 정책 조정관. 평양/AP 연합뉴스
이 로드맵을 따라 페리는 1999년 5월 북한을 방문했고 이어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방북해 김정일을 만났다. 미국과 북한은 수교 직전까지 갔다. 바로 그때 조지 부시 정권이 들어서 클린턴의 정책을 모두 파기했다. 북·미는 대결 국면으로 돌아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전략 없는 인내’로 일관하면서 북한에 네 차례 핵실험과 핵무기 고도화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이런 국면을 되돌리려고 힘쓰기는커녕 상황 개선 시도를 저지하고 ‘북한 붕괴론’을 퍼뜨리는 데 열을 올렸다. 페리 프로세스 입안을 전후한 김대중 정부의 노력은 한반도 냉전 종식이라는 사활이 걸린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전쟁의 먹구름에 휩싸일 수도 있고 화해의 햇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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