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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3 17:17 수정 : 2016.10.23 19:11

이제훈
통일외교팀장

한국의 회고록 문화는 척박하다. 질은 차치하고 양이 절대적으로 적다. 대필이 숱하다. 직접 썼어도 역사적 증언보다 홍보가 앞서거나 에피소드 일색일 때가 많다. 역사적 배경이 있다. 오랜 식민, 전쟁과 분단, 독재를 거치며 ‘기록하면 위험하다’는 집단 무의식이 똬리를 튼 탓이다.

그래서 ‘동북아 탈냉전의 청사진’이라 불린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의 주역인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쓰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기뻤다. 처절한 협상 과정의 내밀한 증언에서, 말라죽어가는 평화로운 동북아의 비전을 되살릴 불씨를 찾고 싶어서다.

애초 송 전 장관은 크리스토퍼 힐 당시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와 함께 9·19 공동성명에 초점을 맞춘 책을 써서 성명 채택 10돌인 2015년 9월에 출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힐이 2014년 10월 회고록 <아웃포스트(OUTPOST)>(한글판 <미국 외교의 최전선>, 2015년 메디치)를 출간했다. 더구나 그 책엔 9·19 공동성명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구실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

송 전 장관은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기록과 사고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독자 집필로 방향을 돌려 두툼한 회고록을 썼다. 40년 세월 한국 외교의 최전선을 지켜온 베테랑은 ‘비핵화와 통일외교의 현장’(부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중 극히 일부인 2007년 11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방침을 둘러싼 참여정부 내부의 논쟁 관련 기술을 빌미로, 새누리당이 정치공세를 펴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이 유감스러운 사태는, 회고록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초판 1500부가 소진됐고, 7000부 넘게 주문이 밀렸다.

송 전 장관은 ‘북한 핵’ 문제를, “그 밑에 거대한 빙하”가 도사린 “냉전의 잔재”(회고록 14쪽)로 인식한다. ‘북핵 문제’를 냉전체제에 따른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로 여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기본 인식을 공유한다.

그런데 문제 풀이 방법론은 결이 다르다. 송 전 장관은 “한·미 협의가 잘 돼야 남북 회담도 잘 된다”며 “남북관계가 북핵 문제 해결을 뒷받침”(408~409쪽)해야 한다는 쪽이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 다수 참모는 ‘남북관계 진전’을 정세 안정과 문제 해결의 마중물이자 견인차로 삼았다. 이 차이는 대외정책 수립·집행 과정에서 자주 외교부와 통일부의 이견·충돌로 표출됐다. 2007년 북한인권결의안을 두고 통일부 장관(이재정)과 외교부 장관(송민순)이 가장 격하게 논쟁한 건, 숱한 충돌의 한 사례일 뿐이다. 남과 북이 별도의 유엔 회원국이되,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남북기본합의서)인 탓이 크다.

<빙하는 움직인다>와 함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창비)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칼날 위의 평화>(개마고원)를 꼭 챙겨 읽기를 권한다. 이 중대하고도 미묘한 차이의 역사적 연원과 정책적 함의를 파악하는 데 최고의 안내서다.

회고록은 외교문서가 아니다. 특정인이 자료와 기억에 의지해 세상에 내놓은 역사적 증언이다. 송 전 장관도 강조했듯이 “같은 사실도 각자가 놓인 위치에 따라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때로는 사실 자체가 왜곡되기도 한다”(6쪽). 하여 회고록은 많을수록 좋다. 끊임없는 교차 검토로 ‘사실’을 추려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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