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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3 10:07 수정 : 2019.03.25 11:49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사법부
①사상 초유 재판의 시작

재판개입 등 ‘사법농단 사태’로
전·현직 판사 14명 피고인으로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상황
임종헌 전 차장 재판으로 시작

“권력과 재판거래는 가공의 프레임”
임 전 차장, 변호인보다 먼저 발언
“검찰 공소사실 어처구니 없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목소리 높여

기소 피한 연루 의혹 판사들
“검찰이 더 썩었는데 왜 우리만”
“법원 내부 이념 세력의 겁박”
각종 논리 펼치며 ‘장외변론’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사법농단 사태’ 관련 첫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의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피고인이 변호인보다 먼저 발언하겠습니다.”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대리인 이병세 변호사의 말에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가 “변호인이 먼저 의견을 진술하고 피고인이 이어서 이야기하라”고 말하자, 임 전 차장이 변호인보다 먼저 손을 든 것이다. 검찰이 공소사실을 약 1시간20분 동안 읽은 뒤, 이에 대한 피고인 쪽의 의견을 말할 차례였다. 지난해 11월14일 구속기소된 뒤 117일 만에 처음으로 법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임 전 차장은 ‘만반의 준비’를 해온 듯 했다. 파란색 수의를 입고 굵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호송차에서 내릴 때부터 두툼한 노란색 봉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11명이었던 변호인이 재판부의 주 4회 재판 진행에 반발해 전원 사임한 뒤 2명의 변호인 만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당황하거나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 에이포(A4) 용지에 미리 작성해 온 자필 원고를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법치주의의 상징이자,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인적 적폐 대상으로 내몰리고 내부 갈등을 겪게 돼 마음이 아픕니다. 다만, ‘양승태 사법부’가 검찰이 단정하듯 재판 거래와 관여를 일삼은 터무니 없는 사법적폐의 온상으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임 전 차장이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는 작심한 듯 10여분 동안 발언을 이어갔다. 과거 법원행정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재판 독립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지만 유관기관과 관계를 단절한 채 유아독존할 수는 없다”며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 (일선 재판에) 관심을 갖고 모니터링”한 것일 뿐, “재판 거래로 권력과 유착했다는 것은 가공의 프레임”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에 대한 변론이면서, ‘사법농단’의 진원지로 지목받고 있는 과거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법원행정처를 위한 변론이었다.

이날 재판을 시작으로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을 둘러싼 형사재판이 본격화했다. ‘사법농단 사태’는 양승태(71) 전 대법원장 시절(2011~2017년) 6년 동안 양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차장을 필두로 한 고위 법관들이 상고법원 도입 등을 위해 재판을 박근혜 정부와의 흥정 대상으로 삼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일컫는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에 인사 불이익을 주는 한편 비리를 저지른 판사들의 잘못은 덮으려 했다는 의혹 등도 있다.

법대에 앉아 법봉을 두드려왔던 14명의 전·현직 판사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 ‘손발’ 노릇을 했다는 일선 법관들, ‘몸통’으로 불리는 임종헌 전 차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 그리고 사법부 수장으로 그 ‘정점’에 있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그들이다. 개인비리 등으로 법정에 섰던 판사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법원장과 대법관이라는 최고위급 법관을 포함해 이렇게 많은 수의 판사들이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는 일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상황이다.

“검찰은 임종헌의 저격수”

“적폐청산이라는 정치적 환경 속에서 검찰은 편향된 시각으로 엄청난 양의 수사기록을 만들어냈습니다. 공소장과 언론 보도로 피고인은 국민들에게 이미 일그러진 모습이 돼버렸습니다.”(이병세 변호사)

지난 11일 재판에서 임 전 차장 쪽은 검찰의 수사와 기소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이 “임 전 차장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검찰 수사·기소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임 전 차장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변호인 앞에 놓인 마이크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다놓으며 수차례 ‘셀프 변론’을 하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피고인의 이중적이고 자기모순적 태도에 대해 지적하고자 합니다. 피고인의 태도야말로 심리 초반부터 정당한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대해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 선고를 도모하려는 매우 부적절한 시도입니다.”(검찰)

“검찰이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임종헌에 대한 저격수’를 자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약간 흥분했습니다만, 이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임종헌 전 차장)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임 전 차장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왔다. 하지만 형사 재판이 본격화하자 적극 반론에 나서고 있다. “과거 행위는 정당한 사법행정권 행사의 범위 안에 있었던 일” “일부 남용이나 일탈이 있었다 할지라도 형법상 죄를 물 수 없다”는 논리가 핵심이다. 나아가, 사법농단 사태를 ‘현 정권의 전 정권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지난해 5월 “‘형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 법원의 자체조사 결과로 마무리됐어야 할 사건”(3월11일 재판에서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언론과 합작해 자신을 ‘여론의 법정’에 세웠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3차 자체 조사인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사법행정권 남용은 확인했지만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결론을 내려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들의 주장을 거드는 동료 법관들도 언론과 주위 판사들을 상대로 ‘장외변론’을 이어가고 있다. 논리는 다양하다. “검찰이 더 썩었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두들겨맞아야 하나.” 사법부와 검찰을 대립각에 세워둔 이 주장에서 사법농단은 사법부에 대한 검찰의 공격으로 규정된다. “법원 내부 이념 세력의 겁박이다.” “과거 선배 법관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우월의식 때문이다.” 이런 발언들 뒤에는 이번 사태의 발단을 법원 내부의 ‘이념다툼’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깔려있다. 사법농단 사태에서 일정 역할은 담당했지만 기소는 피한 한 법관이 “내 임기가 김명수 대법원장 임기보다 길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풍문도 떠돈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을 때 움츠렸던 연루 법관들이 최근 이렇게 하나둘 고개를 드는 것은 결국 ‘직권남용’이라는 법리의 복잡함을 이용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법원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보석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내가 제일 고통받고 있다”

지난달 26일, 15일 전(11일) 구속기소됐던 양 전 대법원장이 검은색 양복, 하얀색 셔츠 차림으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법정에 들어섰다. 보석(보증금 등 조건을 내건 석방) 청구를 위한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보석 신청은 지난 5일 기각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잠시 착각한 듯 증인석에 앉으려다 법정 경위의 안내를 받고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앉아서 해도 되겠습니까.” 재판시작 50여분 만에 발언 기회를 얻은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부에 물었다. 그리고 13분 동안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검찰의 공소사실은) 내 생각에는 너무 어처구니 없다“. “그런 검찰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난히 “나는”, “내가”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불구속 재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힘주어 말했다. “이 사건으로 가장 아픔을 겪고 고통을 받는 사람이 바로 본인입니다. 피고인입니다.” 한때 ‘제왕적 대법원장’이라 불렸던 양 전 대법원장의 인식은 피고인석에 앉게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진 것 없어 보였다.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을 살펴보면, ‘자신이 가장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좁은 방에서 기록을 검토하고 사람과의 만남이 제한되는 등 구속 피고인으로서 겪는 괴로움이 있겠지만, 그게 바로 구속 제도의 본질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재판개입으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피해자들 다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보석심문 기일에서 ‘장벽’과도 같다고 표현한 300여페이지의 공소장에는 재판 거래 의혹의 피해자들이 나열돼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통합진보당 등이다.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의 경우,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뒤늦게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지만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 4명 중 3명은 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 전범기업이 피해자에 1억원씩 배상하라’는 2012년 5월 대법원의 판단을 다시 확정하는 데 6년5개월이 걸렸다. 대법원이 지난해 공개한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문건 410개를 살펴보면, 재판거래와 개입이 의심되는 피해자의 범위는 더 늘어난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 이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이 법원이다. 하지만 양승태 사법부는 이를 외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는 약자를 위한 마지막 보루여야 하지만 양승태 사법부는 정치·행정 권력과 결탁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사회적 강자가 앞세우는 ‘국익’을 명분으로 약자, 소수자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진실을 규명하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처벌해 사법부 신뢰를 바로 세우는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법농단 재판은 시작부터 녹록치 않은 모양새다. 사실관계와 법리에 대한 다툼은 물론, 재판 진행 방식부터 양쪽의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다. 사법농단 재판의 첫 테이프를 끊은 임 전 차장은 전·현직 법관의 검찰 진술 조서를 대거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판 전략을 수정했다. 피고인이 검찰에서 작성된 진술조서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미 조사한 이들을 다시 증인으로 법정에 소환해야 한다. 검찰은 그 규모를 210명으로 본다. 과거 사법농단에 가담하거나 피해를 입은 법관들이 대거 증인으로 소환되는 풍경이 빚어질 수 있다. 그 풍경의 일부를 오는 28일 보게 된다. 재판부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문건을 다수 작성한 시진국·정다주·박상언 판사 등 법원행정처 전 심의관 3명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오는 28일 시진국 판사에 대한 증인신문이, 다음달 2일 정다주, 4일 박상언 판사의 증인신문이 차례로 예정돼있다. 긴 여정이 시작됐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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