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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4 17:54 수정 : 2019.06.25 09:42

줄헤르만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전 노조위원장이 5월13일 금속노동자연맹 브카시 지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노조 파괴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삼성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브카시/김도성 <한겨레티브이> 피디

글로벌 삼성 지속 불가능 보고서 무노조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전 노조위원장 줄헤르만
협박·폭행·매수·분열공작·용역깡패 폭행
글로벌 표준에 맞지 않는 글로벌 기업의 ‘악습’

줄헤르만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전 노조위원장이 5월13일 금속노동자연맹 브카시 지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노조 파괴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삼성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브카시/김도성 <한겨레티브이> 피디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전자는 이제 한국만의 기업이 아니다. 초국적 기업 삼성전자는 세계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삼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특히 삼성전자의 주요 생산기지로 떠오른 아시아 지역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 현실은 어떨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한겨레>가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3개국 9개 도시를 찾았다. 2만여㎞, 지구 반 바퀴 거리를 누비며 129명의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설문 조사했다. 국제 노동단체들이 삼성전자의 노동 조건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한 적은 있지만, 언론사 가운데는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시도다. 10명의 노동자를 심층 인터뷰했고, 20여명의 국제 경영·노동 전문가를 만났다. 70일에 걸친 글로벌 삼성 추적기는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외면하려 했던 불편한 진실을 들춘다.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당장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글로벌 기업으로서 삼성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판단한다. 5차례로 나눠 글로벌 초일류 기업 삼성전자의 지속 가능성을 묻는다.

‘무노조’는 전세계 삼성 공장을 하나로 묶는 열쇳말이다.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며 무노조 원칙을 천명한 이래 3대에 걸쳐 고수하고 있는 경영 방침이다. 그러나 글로벌 기준에 맞지 않는 이 시대착오적 경영 방침은 이미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현재와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다. 전세계 삼성 공장 가운데 최초로 합법적인 민주노조를 세웠던 인도네시아 사례를 통해 그 실태를 전한다.

인도네시아 치카랑 삼성전자 공장의 엔지니어였던 줄헤르만(39)은 2012년 10월21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날은 삼성전자 국외 생산법인에 처음으로 합법적인 민주노조가 설립된 날이다. “노조 설립증을 회사에 직접 전달했어요. 관리자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어요. 많이 놀란 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줄헤르만은 그와 동료들에게 닥칠 시련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삼성은 국내에서 하던 대로 협박과 회유, 미행과 폭행으로 대응했다. 노조원들은 공장 안에서 감시를, 공장 밖에서는 미행을 당했다. “비정규직 차별 없는 공장을 만들자”는 목표로 결성된 노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삼성의 계속된 협박에 불안에 떨던 노조원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삼성이 노조를 완전히 파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40일이었다.

인도네시아 금속노동자연맹(FSPMI) 소속 삼성전자 노조 위원장이었던 줄헤르만은 <한겨레>의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다. 그는 “한국 언론에 안 좋은 기억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얼버무렸지만, 거절의 진짜 이유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야 들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가 성사된 건 현지 시민단체와 노조의 끈질긴 설득 덕분이었다. 그가 외국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의 치카랑 공장 노조 파괴는 국제노동단체 보고서에 간략한 사례로만 언급됐다. 지난 5월13일과 17일 금속노동자연맹 브카시 지부 사무실과 인근의 한 모스크에서 그를 만나 오랜 시간 묻어뒀던 노조 파괴의 전말을 들었다.

정규직-계약직-파견직 ‘차별 피라미드’

줄헤르만은 1999년 입사해 생산라인 엔지니어로 일했다. 정규직이었고 핵심 인력이었다. 생산직 노동자의 행동을 분석해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업무도 했다. 줄헤르만이 삼성에 입사한 이유는 가족을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였다. 그에게 삼성의 첫인상은 “안전한 노동 환경과 높은 임금을 주는 최고의 글로벌 기업” “오래 일하고 싶은 평생직장”이었다.

환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깨졌다. 노예처럼 혹사당하는 자신과 동료들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른바 ‘문제사원’(MJ, 삼성이 노조 결성 가능성 있는 사원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어갔다. 함께 일하던 파견직(아웃소싱) 동료들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잘려 나가기 일쑤였고, 목표 생산량을 채우지 못해 매일 초과근무를 해도 수당은 지급되지 않았다. “친한 동료 가운데 파견직이 많았습니다. 파견직 동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는데 임금과 식대에서 차별을 받았어요. 열심히 일해도 갑자기 잘리는 경우도 많았고요.”

‘하모니’라는 이름의 어용노조

당시 치카랑 공장 전체 노동자 2800여명 중 계약직과 파견직이 800여명씩이었다. 세계 인구 4위 인도네시아의 내수용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이 공장은 사실상 비정규직의 피와 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삼성은 한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정규직-계약직-파견직으로 나눠 임금과 처우를 차별했다. 물량이 많은 7~12월 성수기에 생산인력을 집중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동 유연화 전략이었다. 관리자에게 차별 문제를 항의했지만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는 질책이 돌아왔다.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인도네시아 노동법상 파견노동자를 정규직과 함께 생산라인에 투입하는 것은 불법이다.

노조 결성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줄헤르만은 금속노동자연맹을 찾아가 삼성 공장 상황을 설명하며 노조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금속노동자연맹은 비정규직 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주변 사업장의 노조 결성을 돕고 있었다. 2개월 만에 삼성 정규직 10명, 파견직 300명이 노조 설립에 뜻을 모았다. 노동부에 정식 등록 절차를 밟은 뒤 합법 노조가 됐다. 줄헤르만은 “비정규직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장을 만들자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때 회사에는 ‘하모니’란 노조가 있었지만 어용노조여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했다. 삼성 관리자들은 “회사에 하모니가 존재하니 다른 노조는 필요 없다”는 논리를 노동자들에게 교육했다. <한겨레>가 만난 하모니 전직 간부조차 하모니를 “비정규직을 늘리고, 초과근무 시간을 확대하는 등 회사 쪽 요구를 동의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단체”라고 표현했다.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전 노조원들이 5월13일 금속노동자연맹 브카시 지부 사무실에서 2012년 말 삼성의 노조 파괴 전말을 증언하고 있다. 브카시/김도성 <한겨레티브이> 피디

협박과 미행, 감시 그리고 분열 공작

노조 결성 사실을 안 삼성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줄헤르만과 노조원들을 줄줄이 불러 회유에 들어갔다. “‘정규직인데 왜 노조를 만들었냐’ ‘회사 (무노조) 방침 알지 않느냐’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며 노조 탈퇴를 강요했어요. 사내 변호사까지 나서서 노조원들을 작은 방에 가둬놓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협박했어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노조를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도네시아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국으로 한 사업장에도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복수 노조가 공존했다. 노동법상 직원 50% 이상이 동의해야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어서 줄헤르만의 노조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는 조건이었다.

‘삼성에서도 노조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노조 와해 속도가 더뎌지자 삼성은 더 노골적으로 노조원을 탄압했다. “공장 안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어요. 관리자가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지, 실수하지 않는지를 지켜봤어요. 물량을 더 몰아줘서 화장실도 못 가게 괴롭혔어요. ‘돈을 노리고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 때문에 공장이 문 닫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비노조원들이 노조원을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 안에 주차된 제 오토바이 안장을 누가 칼로 찢어놓은 일도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공장에 나가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용역 깡패 폭행에 머리 깨진 조합원

공장 밖에서도 압박이 이어졌다. 삼성 관리자들이 핵심 노조원의 집 주변을 감시하는 방법이었다. “하루는 한 노조원이 아파서 월차를 썼는데 관리자가 집에 찾아와 진짜 아픈지 확인하고 가기도 했어요. 아들 졸업식에 참석한 노조원에게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제출하라는 일도 있었고요. 비노조원에게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감시당하는 기분이었어요.” 노조활동에 대한 희망은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위협과 폭행의 정도는 더 심해졌다. 노조 파괴에 항의하고자 11월19일 치카랑 공장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노조원들은 집회를 방해하려 동원된 용역 깡패에게 위협과 폭행을 당했다. 집회에 참여한 노조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집회 시작 몇시간 전부터 용역 깡패와 경찰 병력 수백명이 공장 주변을 에워쌌다. 충돌이 발생해 머리가 깨지고 손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은 집회 참가자도 있었다. 경찰이 끌고 나온 개한테 물린 노조원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줄헤르만은 “노조가 결성된 뒤 매일 노조원들이 불안에 떨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노조 결성과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다.

삼성의 노조 파괴에 항의하기 위해 2012년 11월 인도네시아 치카랑 공장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용역 깡패와의 충돌로 머리가 깨지는 상처를 입은 집회 참가자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금속노동자연맹 제공

파견직부터 시작된 매수 작전

삼성은 약한 고리부터 공략했다. 고용이 불안한 파견노동자들을 회유하는 방법이었다. 관리자들은 파견노동자들에게 “당장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협박하면서 “퇴직금을 받고 사직할 것”을 제안했다. 인도네시아 노동법상 파견직은 계약이 해지될 때 원청에서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 “파견노동자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어차피 잘리는데 퇴직금이라도 받고 나가고 싶다’는 동료도 있었어요. 파견직 노조원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면서 노조활동이 힘들어졌죠. 공장 사람들 전체가 적 같았어요. 끝까지 남아 있던 저랑 간부들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줄헤르만은 12월 초 사직서를 제출했다. 국외 첫 합법 민주노조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다. 노조가 만들어진 지 약 40일 만이었다. 그는 “그렇게 빨리 노조가 파괴되고 회사를 떠나게 될지 몰랐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노조원은 삼성에서 사직한 뒤 종적을 감췄다. 그들에게 삼성 노조활동 이력은 취업을 가로막는 오점이자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노조 설립 내홍을 겪은 뒤 치카랑 공장 인사팀 주요 간부들이 한국 본사로 소환된 것으로 전해졌다. 줄헤르만은 “노조 설립을 막지 못한 문책성 소환”이라고 해석했다.

줄헤르만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전 노조위원장이 5월17일 브카시의 한 모스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브카시/옥기원 기자

“삼성은 무서운 기업입니다”

줄헤르만은 삼성을 떠난 뒤 브카시 지역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노조가 와해된 뒤 다시 다른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무서운 기업입니다. 많은 노조원이 지금도 삼성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삼성이 또 보복할 수 있다며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지 말라고 권유한 동료도 있었어요.” 그가 인터뷰를 거절했던 진짜 이유다. 가게를 너무 오래 비워뒀다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줄헤르만에게 “다시 돌아가도 노조를 만들 거냐”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는 주저 없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노조를 만들 것 같다. 노동자를 괴롭히는 삼성에는 노조가 꼭 필요하다”고 답했다.

줄헤르만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중앙에 우뚝 선 갤럭시 S10 광고판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높은 시장점유율로 인도네시아에서 2년 연속(2017~2018년) 브랜드 평가 1위를 한 최고 기업이다. 합법 노조를 짓밟고, 비정규직을 착취해 세운 이 영광의 탑은 얼마나 오래 빛날 수 있을까.

삼성전자 본사는 인도네시아 노조 와해에 대한 질문에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상생하는 노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현지법에 따른 임직원의 결사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다”고 답했다.

브카시/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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