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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5 19:28 수정 : 2020.01.06 09:19

박경만 ㅣ 전국2팀 선임기자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온 킹>에서 권력욕으로 가득 찬 삼촌의 음모로 왕국에서 쫓겨난 어린 사자 ‘심바’를 도와주며 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친구가 바로 멧돼지 ‘품바’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감초 구실을 톡톡히 한, 의리 있는 친구인 멧돼지가 지금 한국에서는 절멸 위기에 빠졌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을 막는다며 무차별적 멧돼지 사냥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남북 접경지역의 야생 멧돼지에서 이 병의 바이러스가 검출됐다는 이유로 야생 멧돼지의 ‘씨를 말리는 식’의 대책을 내놨다. 멧돼지 1마리당 포상금 20만원을 내건 덕분에 ‘살육의 축제’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지방정부도 가세했다. 강원도는 접경지역 5개 시군의 ‘멧돼지 제로화’를 천명했고, 아프리카돼지열병과 무관한 충청북도는 충북에 사는 전체 멧돼지의 절반가량을 포획하겠다고 선포했다. 경상북도에서는 멧돼지 사냥이 한창이던 지난해 10~11월 전국에서 가장 많은 7410마리를 잡았다. 이 지역에선 멧돼지나 집돼지에게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검출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데, 애먼 멧돼지만 죽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전국의 야생 멧돼지 30여만 마리 가운데 30%가량이 몰살됐다.

정부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주범으로 사실상 야생 멧돼지를 지목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 병의 정확한 발병 원인이나 전파 경로가 밝혀지지 않았고, 멧돼지가 사육 농가로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논리다. 멧돼지가 바이러스를 전파한 가해자가 아니라, 도리어 집돼지에게서 감염됐을 가능성이 더 큰 상황인데도, 멧돼지를 무차별 사냥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는 최근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닭이나 오리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폐사하면 다짜고짜 철새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는데, 에이아이 바이러스는 거의 언제나 인간이 옮긴 것으로 드러났고, 사육 동물의 유전자 다양성 결여와 공장식 밀집 사육 때문에 급속도로 확산된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또한 멧돼지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밝혔다. 이우신 서울대 교수(산림과학부)도 지난해 11월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경기도와 강원도 이남 지역에서 1만 마리에 가까운 멧돼지 집단 포획이 이뤄졌는데도 바이러스가 전혀 검출되지 않은 것은 멧돼지 관리(포획)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멧돼지의 반격일까. 최근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멧돼지를 포획하려고 나선 엽사가 멧돼지 공격을 받고 사망한 일이 있었다.

한국은 2010~2011년 구제역으로 350만 마리가 넘는 돼지와 소를 땅에 묻었다. 2016~2017년 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했을 땐 닭과 오리 등 3800만 마리를 파묻었다. 가축 전염병이 되풀이될 때마다 정부는 도축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가축을 유통하고 선진적인 방역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 대신, 모조리 파묻어 없애버리는 손쉬운 길을 택해왔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정부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시작해 얼마나 퍼져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경기도 파주 등 4개 시·군의 사육 돼지 전량(38만여 마리)을 살처분했다. 정부지침에 따라 방역을 해온 농가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방역 실패의 책임을 멧돼지에게 떠넘기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을 비롯해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등 재난에 가까운 가축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은 현대의 밀집형·공장형 축산 시스템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시스템의 조속한 개혁이다. 멧돼지를 때려잡을 때가 아니다. 축산 시스템을 제대로 개혁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는 앞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책임을 야생동물에게 떠넘길 것인가. 지금, 이 땅의 수많은 품바가 지옥을 겪고 있다.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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