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11 14:18
수정 : 2006.10.1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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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미국 대통령 9일 오전 북한의 핵실험 주장 이후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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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거지는 ‘부시 책임론’…미국 언론·정치권 “북한 무시가 핵개발 내몰아”
북한이 강행한 ‘핵 실험’으로 ‘한반도 전체’가 위기에 처했다.
세계 최고의 인구밀집도를 보이는 남한은 주민들이 머리 위의 대량살상무기를 염두에 둔 채 삶을 이어가야 하고, 가뜩이나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들은 전세계적 제재와 경제봉쇄에 다시 ‘고난의 행군’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한 압박을 지속해온 조지 부시 대통령도 다른 차원의 궁지에 몰리고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 다수와 정치인들은 10일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이 김정일 위원장을 ‘핵도박’으로 내몬 측면이 있다며 ‘부시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북-미간 직접대화 지지자들은 과거 옛 소련과 중국이 지난 1949년, 1964년 각각 첫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도 당시 미 정부는 이들과 외교관계와 비상 대화통로를 유지해온 반면, 부시 행정부는 지금 북한과 직접적인 대화창구를 끊어버려 상호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레그 전 대사 “미국의 어려움은 부시가 ‘친구들’과만 대화하기 때문” 비판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는 “지금 전세계에서 여러 어려움을 맞고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부시 행정부가 외교를 ‘착한 행동’(good behavior)에 대한 보상쯤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은 지금 친구들과만 대화를 하고 있다”고 정면 비판했다.
민주당 2008 대선 예비주자들 중 한명인 러스 페인골드(위스콘신) 의원도 “북한핵실험은 부시 정부의 대북 불간섭주의식 접근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부시 대통령을 비난했다.
한반도 전문가로 북한을 수차례 방문했던 공화당의 커트 웰던(펜실베이니아) 의원도 10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접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며 즉각적인 북미간 양자회담 착수를 요구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베이커 전 장관도 8일과 9일 방송에 출연해, “북한과 대화하는 게 곧 유화정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북미간 직접대화를 촉구했다.
뉴욕타임스 “라이스 국무장관, 북핵 보유에 부인과 시간끌기로 일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북 핵실험이 외교정책의 실패로 부각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를 앞두고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마이클 오핸런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안보이슈를 강점으로 하는 공화당으로서도 외교의 실패가 부각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 상황”이라며 “북한 핵실험은 안보문제지만 결코 (공화당에) 유리한 이슈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10일치 신문에 사설 ‘북한과 핵폭탄’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다. 이 신문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안보 보장을 포함한 다양한 거래에 관한 진지한 제의를 시도하지도 않았다”며 “지난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을 눈길끌기용이라고 일축하는 등 부인과 시간끌기에 몰두했다”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이 어떤 대가를 받아야 핵무기를 단념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협상뿐”이라고 사설을 통해 주장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도 10일치에서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 된 과정을 보도했다.
NYT 크리스토프 “성적표가 말해준다. 북한 플루토늄, 모두 부시행정부 때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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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콜러스 크리스토프(NYT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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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10일치 칼럼 ‘괴물들과 대화하기(Talking with the monsters)’에서 더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협상을 주장했다. 크리스토프는 올해 퓰리처상 시사평론상을 받은 바 있는 뉴욕타임스의 대표적인 칼럼니스트이다.
크리스토프는 10일치 칼럼에서 “부시 대통령이 한반도에 저질러놓은 혼란을 바로잡는 것은 늦었지만 가능하다”며“유엔 결의안을 진행시키면서 북한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에는 늦었을지 모르지만, 북한이 플루토늄 생산을 동결하고 미사일과 핵 실험을 중단할 가능성도 있다”며 중국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프는 이 칼럼에서 “아버지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모두 북한과 대화를 했다. 이를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북한이 행동을 아주 약간 온건하게 바꾸도록 하는 인센티브를 만들어냈다”며 “콜린 파월을 비롯한 행정부의 온건파들이 원했던 대로 북한과 대화를 했더라면, 오늘날 같은 핵위기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부시를 비판했다.
크리스토프는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부시행정부와 북한과 대화를 추진했던 클린턴정부와의 ‘북핵 성적표’를 비교하며, 부시를 공격했다. 크리스토프는 “북한이 얻은 플루토늄이 성적표”라며 “클린턴 시절 북한이 확보한 (플루토늄) 양은 전무하나, 부시가 들어선 뒤 확보한 양은 8기의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클린턴정부 말기부터 핵무기 개발을 위한 별도의 방법으로 추진한 우라늄 농축은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크리스토프는 부시 대통령이 대화를 시도한 수단과 리비아에서는 각각 전쟁을 끝내고 대량살상무기(WMD)의 포기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지만, 직접적 외교를 회피한 북한과 이란에 관해서는 심각한 실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괴물들을 만났을 때, 죽이거나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것보다 대화를 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 북한의 대포동로켓 발사와 지하핵시설 의혹으로 높아졌던 1차 북핵위기를 막은 ‘페리 프로세스’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고 있다. ‘페리프로세스’를 만들어낸 윌리엄 페리 전 미 대북정책조정관은 3년전에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때의 위험을 예고하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다시 ‘북한과의 협상’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페리는 <워싱턴포스트> 2003년 7월23일치에 ‘북한, 핵이냐 협상이냐(It's Either Nukes or Negotiation)’ 기고를 실어, 북한이 끊임없이 핵무기를 소유하고자 한다며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협상’밖에 없다고 주장해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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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타임스, 북 핵개발 과정 상세히 전달하며 부시 대북정책 비판
미 서부의 주요 일간신문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도 10일치에서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 된 과정을 실었다.
기사에서 아시아재단의 북한 전문가 스콧 스나이더는 '누가 북한을 잃었는가'라는 문제를 논하려 한다면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반을 짚었다.
스나이더에 따르면 북한은 1960년대 소련의 도움을 받아 핵 에너지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0년대 초반 이런 계획에 속도를 냈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인 1994년 북-미간 기본합의문이 서명됐고 북한은 핵활동 동결을 선언했다.
2000년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일과 회동하는 등 북핵 문제는 평화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 후 대북 정책은 급격한 변화를 거듭했다.
부시 대통령은 곧바로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 정권을 공개적으로 못마땅하다고 비판했다. 2002년 10월 평양에 특사로 갔던 제임스 켈리가 "북한이 우라늄 농축 핵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은 대북 중유지원을 중단했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수주 후 영변에 설치한 유엔 감시카메라를 뜯어낸 뒤 핵동결 해제를 발표한 데 이어 지체없이 2003년 중반부터 핵개발 재개를 선언하고 플루토늄을 추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미국은 경고 메시지를 보냈을 뿐이며 북한과 단독 대면하기를 외면한 채 6자회담만 고집해 사태를 그르쳤다고 스나이더는 분석했다.
실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는 북핵 위기 상황은 미 행정부가 북한과 직접 대화한다면 풀릴 수 있을 것이라며 2002년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제안서를 가져왔지만 부시 행정부는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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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핵위기 파국 막은 ‘페리 프로세스’ 다시 주목
페리프로세스란
페리보고서는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로켓을 발사하고 금창리 지하 의혹시설에 대한 미국내 보도가 잇따르면서 제네바 합의마저 위태롭게 된 상황에서 나왔다. 당시 공화당 주도의 미국 의회는 대북정책 검토를 요구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1998년말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다. 페리가 중심이 돼 한국, 일본과 조율을 거쳐 1999년 5월 북한 방문 협의를 통해 마련된 이 보고서는 북한에 대한 포괄적 접근을 명시한,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를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으로 제안했다.
페리프로세스는 단기적으로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중지하고 미국은 적절한 제재완화 조처를 취함으로써 상호 위협 감소를 통한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을 추진한다는 것이 그 뼈대로, 남한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페리 프로세스는 대북 강경 기조의 부시 행정부가 등장 이후 휴짓조각이 되었고, 2006년 10월 한반도에 다시 북핵위기가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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