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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02 10:40 수정 : 2006.11.02 10:40

지난달 31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북한과 미국, 중국간 3자 비밀회동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사됐을까. 그리고 한국은 그 과정에서 정말 '왕따'를 당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3자 비밀회동은 그야말로 극비리에 추진됐다. 그래서 중국 당국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세계의 언론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차이도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국가적 이익 때문에 모든 내용을 공개할 수도 없고.."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이다.

◇ 비밀회동 추진 경위 = 지난달 19일 평양에서 진행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특사간 만남에서 일이 시작된다.

'6자회담에 복귀할테니 미국도 BDA(방코델타아시아) 계좌 동결과 관련해 성의를 표하라'는 북한의 메시지가 나왔다.

탕 특사는 다음날 베이징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만났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라이스 장관은 "6자회담 복귀와 같은 북한의 제안을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류의 변화는 확연했다. 북한의 의지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으로부터 '협상에 복귀할 수 있다'는 뜻이 나온 것이었다.

그 사이에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중국이 관련국들에 '특별회신'을 보낸 것은 25일이었다. 평양으로부터 확실히 진전된 내용을 받았음을 뜻한다.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에게 북한의 '3자(북미중)회담 제안'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스 장관은 이 제안을 백악관에 전했고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27일 남태평양 피지에 머물고 있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에게 베이징행을 지시했다. 힐 차관보는 피지에서 호주를 거쳐 30일 베이징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31일 6자회담장으로 쓰인 댜오위타이(釣魚臺)의 한 빌라에서 오전 10시부터 7시간 이상 3자 비공식회동이 이뤄졌다.

중국 외교부는 3자 회담의 합의를 담은 문서를 만들어 당초 이를 이날 오후 4시(이하 현지시간)께 공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날 오후 7시께 이 합의문은 공개됐다. 북한이 6자회담에 전격 복귀하기로 했으며 편리한 가장 빠른 시일내에 회담을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 한국은 정말 몰랐나 = 3자회담과 관련해 알맹이 있는 내용이 전해진 것은 25일이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정부내 기류는 "정말 되겠느냐"는 쪽이 우세했다. 중국이 그동안 비슷한 제안을 했었고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쪽 기류가 약간 달라졌다.

미측도 지난달 29일 이번 일과 관련해 한국측에 연락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힐 차관보의 동선이 확인되지 않더니 30일 베이징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서울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외교부 본부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힐 차관보가 베이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뭔가 되어 가는구나'는 생각을 굳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31일 오전부터 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오후 4시께 3자회동에 대한 결과를 발표한다는 연락이 왔다.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이상 세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회담 결과는 당초보다 3시간쯤 늦은 7시께(서울 시간 8시) 중국 외교부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됐다.

합의문을 확인한 외교부 당국자들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내용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회담개최 시기가 빠진 합의문을 어떻게 해석할 지를 두고 잠시 논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회담에 참가한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구체적인 내용설명을 31일 당일에는 받지 못했다. 결국 다음날 오후 2시께 모든 내용을 통보받았다. 이미 전세계 언론이 베이징 회동 결과를 자세히 알린 때였다.

◇ 당국자들, 내용성 강조 = "북.미.중 3자회동의 단초는 9월14일 한미 정상 회담에서 제기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이었다."

1일 열린 국회 통외통위 국감장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제1차관이 한 말이다.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은 6자회담을 조속히 속개해 북한이 공동성명을 이행하도록 유도하는 방안과 미국이 BDA를 통한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조속히 종결하도록 하는 방안을 접목시킨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베이징 회동과 관련해 한국이 사전에 얼마나 관련 사실을 알고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자세히 말하지 못하지만 알만큼 다 알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는 내용"이라는 말을 주로 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역할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포괄적 접근방안은 한미정상회담 전 우리 측 반기문 외교장관과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 미측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의 2+2 회동을 통해 조율된 뒤 정상회담을 통해 공식 선포됐다.

접근방안의 구체적 내용도 채워지기 전인 10월3일 북한은 핵실험 계획을 발표해 정부를 놀라게했다. 정부의 마음은 바빠졌다. 서둘러 포괄적 접근방안의 구체적 내용을 담아 미측에 설명했고 다시 이를 중국에 제안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국에 전달한 시점이 북한의 핵실험 강행과 맞물렸다. 그때는 10월9일.

이 때문에 바통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노 대통령은 10월13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포괄적 접근방안을 중국측에 전했다.

그리고 6일 뒤인 10월19일 탕 국무위원이 평양을 방문했고 이른바 '평양 메시지'를 갖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정부 당국자들은 31일 베이징 비밀회동을 전후로 관련 사실을 '알만한 수준에서' 파악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까닭에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지적하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도 있다고 시인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북미 양측이 모종의 합의를 이끌어낸 밑거름, 다시 말해 포괄적 접근방안의 내용을 우리가 제안했다는 점이며 이것이 없었다면 베이징 합의도 어려웠을 것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BDA라는 특수한 현안을 논의하는 것은 북미 양자간 접촉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스스로 '자제했다'는 말도 곁들인다. 중재자로서 중국이 참여했지만 이번 회담은 사실상 북미 양자회담의 성격이 강했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lwt@yna.co.kr 이우탁 기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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