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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종합에 나선 언니 홍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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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철 기자의 도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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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종합에 나선 언니 홍수정씨를 응원온 홍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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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에 와서 처음으로 일할 맛이 생겼습니다. 북한 사람들(그냥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과 마찬가진 데 아직 어감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습니다)과 처음으로 얘기를 해 봅니다. 것도 조그마한 체조선수들입니다. 홍수정(20)-은정(17) 자매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송호진 선배가 취재하려했지만, 윗선의 이상한 주문때문에 한발 늦게 제가 왔습니다. 12월 4일. 오늘은 언니인 수정이가 여자 체조 개인종합에 나가는 날입니다. 동생 은정이는 관중석에서 언니를 지켜봤습니다. “언니한테 응원 한 마디만!” 수줍은 많은 10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제가 멍청합니다. 웃기만 할 뿐 당최 입을 열지 않습니다. 작전(?)을 바꿔 예, 아니오로만 말할 수 있는 걸 물었습니다. “언니랑 함께 체조 하니 좋아요?” “네~.”
“어떤 게 좋아요?” “….”
“언니가 잘 해요? 은정이가 잘 해요?” “….”
“언니가 더 잘해요?” “네~.”
“어떤 종목을 젤 잘 해요?” “….”
“도마를 젤 잘해요?” “네~.”
“언니도?” “네~.” 그러는 새 수정이는 여자 개인종합 4종목 중 2종목에서 한 수 앞서며 선두를 달렸습니다. 실수만 안 하면 되는데…. 아쉽게도 수정이는 평균대에서 미끄러져 결국 동메달을 땄습니다. 언니의 찡그러진 표정을 멀리서 동생이 바라봅니다. 짓궂은 질문을 또 던집니다. “실수해서 아쉽죠?” “네~.” “언니 돌아오면 뭐라고 얘기해 줄래요?” “….” 언니가 경기장을 빠져나올 시각이 닥쳐 얘길 끊고, 선수출구로 뛰어갔습니다. 근데, 이 친구. 한 마디도 안 하고 그냥 나가버립니다. 그리 표정이 어둡진 않아보였는데. 수줍게 웃으며 할 말 없다는 표정으로 후다닥 나가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선수가 말을 하지 않겠다는데. 관중석을 돌아보니 은정이를 비롯한 북한 선수들도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없습니다. 그네들이 다니는 통로는 제가 못 갑니다. 그래서 선수들 실어나르는 버스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30분...1시간...그런데, 여기가 아닌가 봅니다. 이미 빠져나갔거나. 수정-은정 자매가 함께 출전하는 내일 도마 경기장에서 다시 보기로 맘 먹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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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평행봉을 하기 전 중국 선수들이 서로 등을 밟아줍니다. 이들은 개인 종합 1,2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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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몸이지만 온몸에 근육이 불끈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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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엔 아예 송호진 선배와 함께 갔습니다. 체조경기장 바로 옆에서 박태환의 수영 400m가 있습니다. 마침 체조 시각이랑 겹칩니다. 이단평행봉은 못 보고, 도마만 본 뒤 전 바로 수영장으로 옮겨야 합니다. 언니인 수정이가 먼저 발구름을 합니다. 근데, 또 실수를 했습니다. “도마는 잘 한다”고 은정이가 말했었는데.... ‘다시 뛰고 싶다’는 표정입니다. 다음엔 은정이 차례. 자매는, 실수를 하는 것도 닮았습니다. 결국 언니가 은메달, 동생이 동메달을 따며 도마를 마칩니다. 그 전에, 수정-은정 자매 얘기를 들을라고, 북한 임원들 옆에서 얼쩡거렸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 역시 입을 잘 열지 않는군요. 유도팀들은 “브이~”하면서 사진도 찍는다는데. 체조팀은 분위기가 이런가 봅니다. 그러곤 수영장으로 옮겼습니다. 송호진 선배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박태환이 400m를 따는 장면을 보면서, 정신없이 기사를 쓰면서, 이단평행봉 결과를 검색합니다. 수정이가 맨 마지막입니다. 은정인 이단평행봉엔 안 나갑니다. 중국 선수가 1위. 짐을 챙기기 전 한번 더 결과를 확인해보니 수정이 이름이 젤 위에 올랐습니다. 선배한테 전화를 하니, 아직 시상식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은정이가 관중석에 앉아있다고 가보라고 합니다.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수영장에 가면서 ‘내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더 부딪혀보기로 합니다. 은정이를 비롯해 많이들 모여있습니다. 고대하던 금메달을 땄으니 기분이 좋아보입니다. 은정이를 다시 보니, 취재를 하겠다는 마음보다, 우선 축하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생깁니다. 어른들, 임원들은 “장군님…”으로 시작하는 소감밖에 하지 않지만, 은정인 시상대에 오르는 언니를 보며 “내가 딴 것보다 더 좋아요”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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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금메달을 보면서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이거 어디다 넣어 가요?"하고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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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수정씨. 오늘은 금메달을 땄는데도 역시 한마디도 안 하는데다, 인터뷰룸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송선배는 수정이 사진을 찍다가 “씨큐리티”라고 적힌 무식한 넘들에게 AD카드를 찢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선배는 틈틈이 은정이와 많은 얘길 나눴습니다. 둘에겐 오빠가 한 명 있다고 합니다. 체조는 10년 남짓, 언니가 2년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국 선수들에게 둘의 얘길 물으니, 이네들, 알고보니 내숭입니다. 선수들끼린 얘기도 잘 하고 과자도 나눠먹고. 은정이가 더 살갑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조선의 남정네에게 쉽게 말을 할 북한 여성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선수들끼리만이라도, 장난도 치고, 수다도 떤다는 말에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네들을 마치 외국사람들처럼 힘들게 만나야 하고, 경기장을 떠나버리면 언제 다시 만날 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게 마음 아픕니다. 제 사투리와 그들의 말들이 섞여 한번에 대화가 오고가지 않는 것도 점점 걱정입니다. 시상식. 오른쪽에 중국 국기를 달고 인공기 두 개가 올라갈 때, 저도 일어섰습니다. 애국가같은 게 울리면 보란듯이 앉아서 내 할 일만 하는 사람이 접니다. 애국가, 국민의례 이런 것에 치를 떨지만, 그냥 일어서고 싶었습니다. 핵, 통일, 평화… 이런 것 따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 다 상관없이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너무나 평범한 생각들을 그제서야 하게 됐습니다. 이 기분에 선배가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도 지치지 않는가보다… 이런 생각도 처음 하게 됐습니다. 물론, 자매 얘기를 기사로 쓴 뒤엔, 다시, ‘해봐야 안 알아주는구나’란 마음으로 돌아갔지만. 그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도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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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개인 종합에서 금메달을 딴 중국 선수의 발(또는 발목) 보호대인듯한 사진입니다. 가벼운 몸이라지만, 그 무게를 견디는 아픔은 저 보호대로 줄여들지 않을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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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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