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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02 19:22 수정 : 2013.12.03 14:09

“내년에 내놓을 옛 가요 리메이크 앨범에 대해 1집처럼 블루지한 느낌의 반주로 갈지, 아니면 기타 등 독기로 심플한 느낌을 살릴까 고민중이에요.” 블루스 가수 강허달림이 지난달 2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새 앨범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블루스 가수 강허달림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상가가 차려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조곡이 흘러나왔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댔죠/ 무슨 의미인지…/ 차갑게 식어버린 말 끝엔/ 단단히 굳어버린 몸짓에/ …/ 이미 시작된 엇갈림 속에/ 다시 사랑은 멀어져가고/ 알면서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 마음/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흐느끼는 듯한 목청에 실려 애절한 상실감을 노래한 ‘미안해요’는 ‘찌질한 실연의 노래’였으나 봉하마을에 모인 사람들에겐 그렇게만 들리지 않았다. 훌쩍 세상의 끈을 놓아버린 노 전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에 망연해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노래로 생각했다. 2008년 발표된 ‘미안해요’는 그렇게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유통됐다. 여성 블루스 싱어송라이터 강허달림(본명 강경순·39)은 2009년 6월 서울시청 근처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추모제에서 이 노래를 생음악으로 불렀다. 전직 대통령 추모제에서 그의 노래가 쓰인 건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강허달림은 그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제에서도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부른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이후 강허달림은 2010년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분신자살한 문수 스님 추모공연,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하는 제주도 강정마을, 유성기업 인권 관련 단체 등의 행사장에도 바삐 달려갔다. 노 전 대통령 추모제 때는 해마다 무대에 섰다. 인권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의 무대에 자주 올라 ‘인권평화 가수’란 타이틀도 붙었다.

그렇다고 인권평화 가수, 소셜엔터테이너라는 울타리에 강허달림을 가둬놓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듯싶다. 한국 인디음악에서도 비주류로 분류되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직접 가사를 붙이고 곡을 입힌 그의 음악적 지향성은 재즈와 팝 장르까지 두루 뻗어 나가면서 빈약한 한국 대중음악의 장르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몸담았던 신촌블루스나 한영애처럼 블루스에 일가를 이룬 가수와는 또 다른, 맑음과 탁함, 떨림이 공존하는 독특한 목소리가 일품이다. 탁월한 리듬감과 감수성, 그리고 공감을 자아내는 가사로 깊이있고 다양한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대중을 파고들고 있다. ‘뽕끼’ 넘치는 한국적 블루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정식 1집 앨범 <기다림, 설레임>(2008년 발표)은 방송을 거의 타지 않고도 1만장의 음반이 팔렸다. ‘허달림표 블루스’ 리듬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다림, 설레임>은 발매된 지 5년이 넘어 뒤늦게 라디오 방송 신청곡으로 들어오고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인 최규성씨는 “강허달림의 1집은 짙은 향내가 진동하는 토종 블루스 명반”이라고 평가했다.

2011년 3년8개월 만에 발표한 2집 앨범 <넌 나의 바다>에서는 블루스 리듬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포크, 팝, 레게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사운드를 다양화했다. 또 자기 이야기가 많았던 1집과 달리 타자에 대한 희망과 용기, 격려를 담아 메시지에서도 진화를 하고 있다.

11월21일 <한겨레>와 만난 강허달림은 3집 음반 출반 계획에 대해 “올 한해는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년 상반기쯤엔 ‘목포의 눈물’ 등 옛 우리 가요를 리메이크해 3집 앨범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와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등 찾아
치유와 위로의 선율로 함께하며
소셜엔터테이너 호칭 얻어

-대표곡 ‘미안해요’는 어떻게 만들게 됐어요?

“남자친구에게 차인 뒤 쓴 찌질한 노래예요. 가장 사적인 가사구요. 한동안 사람들 앞에서 눈 맞추고 노래 못하겠더라구요. 제 안의 상처나 아픔을 들키는 것 같아서요. 1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힘든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상태에서 만들었어요. 힘들 땐 오롯이 힘들어야죠.(웃음)”

-이 노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불러 유명해졌지요?

“상중 봉하마을에서 배경음악으로 계속 틀었는데 그 노래를 들었던 시민추모제 준비하는 사람들이 추천을 했어요. 기타 하나만으로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반응했어요. 울림이 강했던 모양이에요.”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있었나요?

“노무현 대통령이 2001년 선거에 나왔을 때 주변사람에게 ‘안 찍으면 안 된다’고 막 사전선거운동을 하고 다녔어요. ‘노빠’라는 말 싫어했는데 지금은 좋아해요. 김대중 대통령도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가장 자질을 갖춘 대통령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호남사람이라고 하는 게 서운하기도 하고….”

전남 순천 산골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12살 때 이선희의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를 듣고 가수가 될 결심을 했다. 여상을 졸업한 19살 때 무작정 상경했다.

-소셜엔터테이너라는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소셜엔터테이너는 유명한 사람들에게 붙여주는 것 같구요.(웃음) 전직 대통령 추모제 참석한 이후 참가 요청이 많이 왔어요. 우연히 유성기업 촛불문화제에 간 적이 있는데 가족단위로 너무 환한 표정으로 즐기는 모습이 저한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그 이후 자꾸 저를 부르더라구요. 그동안 몰랐던 세상, 사람에 대해 좀더 깊게 알게 된 것 같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참여 활동에 대해 깊은 번민을 했다고 했다.

“문제는 제가 그분들만큼 아픔을 겪지 않았잖아요. 그분들 앞에서 멀쩡하게 노래 부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분들한테는 죽고 사는 문제인데 앵무새처럼 노래만 부르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저는 계속 평화인권 가수로 불리고….” 그러면서 노래로 먹고사는 프로가수로서 열악한 현장공연 상황에 대해서도 회의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1, 2집 음반을 직접 제작해 출반했다. 그의 실력을 인정해 음반을 내주겠다는 제작사가 있었으나 제작 조건이 너무 열악했다. ‘런 뮤직’을 설립해 세션맨과 스튜디오 섭외도 직접 했다.

맑음·탁함 공존하는 독특한 음색
공감 이끄는 가사로 꾸준한 인기
올핸 아이 키우며 ‘엄마’로 살아
내년엔 옛 가요 리메이크 선뵐 것

-블루스 장르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통하는데 그동안 어떻게 버텼어요?

“우선은 후원회가 ‘빵빵’한 것 같아요.(웃음) 인복이 많았다고나 할까. 음악만을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 주변에 음악을 하는 사람이 전무했어요. 그런데 서울재즈아카데미 1기로 들어갔을 때 새 세상이었어요. 블루스와 재즈라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재즈아카데미 자료실 선생님이 제가 청소하고 있으면 불러 앉혀 놓고 이런 음악을 해야 한다고 재즈를 들려주셔요. 초기 블루스·재즈를 들려주고 녹음도 해줘서 초기의 위대했던 보컬리스트나 연주자들의 깊이를 조금씩 체득한 듯싶어요. 블루스 할 때는 엘피를 많이 가지고 있는 분이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음악을 해야 한다며 블루스 시디를 많이 복사해 주셨어요.”

진선미, 송호창 의원 건설회사 홍보실 직원 이상엽씨 등도 그의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해준 사람들이다. 연극공연 구경 갔다가 만난 진선미 변호사는 그날 뒤풀이 때 리영희 선생 앞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강허달림에게 반해 1집을 100장이나 사주고 언니 동생 하며 정신적인 멘토 구실을 해주었다고 한다. 진선미 의원 변호사 개소식 때 만난 송호창 변호사와 이상엽씨는 공연 섭외와 관객동원, 뒤풀이까지 해주며 격려를 해줬다.

-1, 2집 음반을 직접 제작까지 했다면서요?

“없는 돈 끌어다가 1집 앨범을 직접 제작했어요. 세션맨들은 최소 50대 이상 트로트 반주하는 분들이지만 어릴 때부터 블루스나 솔 음악이 몸에 배어 있는 분들이었어요. 이분들은 제 음악을 세션 하는데 너무들 좋아하시는 거예요. 잘됐으면 좋겠다고, 음악이 너무 좋다고. 2집 음반 때도 음악만 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어느 회사에 맡기려고 했는데 녹음 도중 어그러져 어쩔 수 없이 직접 제작하게 됐어요.” 그는 개인적으론 2집에 더 애정이 간다고 했다.

-1, 2집 가사의 차이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1집은 바닥까지 내려간 뒤 정리된 마지막 치열함이 가사에 담겨 있구요. 2집은 치열함을 벗어나 저 자신만이 아니라 타자를 바라보는 부분이 담겨 있어요. 그렇다고 듣는 사람에게 이런 생각을 전달해야지 하면서 가사를 써본 적은 없어요.”

-독특한 목소리의 떨림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창하고 관련이 있나요?

“창을 많이 하진 않았어요. 재즈아카데미 때 창·클래식 발성 2개월의 교육시간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남도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대중음악을 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의 음악은 판소리라고 봐요. 김소희 선생님 소리가 그렇잖아요. 저처럼 쥐어짜지 않아도 곡의 애절함이나 흥이 다 들어 있어요. 소리가 허스키하거나 또랑또랑하지 않아도 구슬픈 소리, 밝은 소리가 다 들어 있고 리듬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가거든요. 내 노래도 그런 내공을 가진 소리였으면 좋겠어요.”

-음악에 전념하기까지 수많은 알바를 했다면서요?

“할 수 있는 알바는 다 해봤어요. 서울예전 들어가기 위해 알바를 했는데 이상하게 일식집은 안 써주더라구요. 촌년이라서 그런가? 중국집에선 두 번 잘렸어요. 제가 성격이 깔끔해서 여기저기 닦다 보니 느리다는 이유였죠. 분식집, 고깃집, 곱창집 등 음식점은 웬만한 곳에서 다 일했지요. 신문배달도 했구요. 어릴 때부터 ‘나는 가수가 되어야 해’라는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게 그 준비과정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그는 서른살 때 딱 한번 가수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동안 활동하던 재즈밴드 ‘풀문’이 해체되고 사귀던 사람에게 차이고, 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도와줄 사람은 전무한 막막한 시절이었다.

귀향했다가 한달 만에 몇 년만 더 해보고 포기하자며 서울로 다시 올라온 강허달림은 유학자금으로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 이후로 음악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한다. 음반 제의도 들어오고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한다.

-예명이 독특합니다.

“강경순이라는 본명이 너무 싫어서 ‘달리자’는 뜻에서 엄마의 성을 덧붙여 지었어요. 나한테 암시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요즘은 경순이 좋아요. 순리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페미니스트 가수, 인권평화 가수라고 불러주는 게 이해 안 되고 그랬는데요. 딱히 제가 자신이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리는지에 연연했던 것 같아요. 꼭 인권평화 가수가 아니어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터뷰/ 김도형 경제국제 에디터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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