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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11 19:21 수정 : 2006.12.12 16:53

서울 도봉구 창동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김기태 <한겨레> 기자(왼쪽 두번째)와 함께 일한 인부들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작업용 엘리베이터인 ‘호이스트’를 타고 현장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김기태기자 달동네에서 한달]
눈치보기 싫어… 장어집 장사 안돼 접고… 화류계 떠돌다가…
누가 뭐래도 집 문제가 제일 큰 걱정입니다

ㅎ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같은 반’으로 일한 네분입니다.

목소리가 구수한 김 반장님(첫번째 사진 맨 오른쪽)은 고향이 전남 나주입니다. “험하던 시절”이던 1979~80년 2년간 광주에서 전문대학을 다녔습니다. 광주민중항쟁 때는 아버지가 나주에서 자전거를 타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자전거 뒷자리에 아버지를 태우고 나주로 들어가 숨어지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전산 관련 일을 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 때 “눈치보기 싫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10년을 건설 현장에서 목공일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수입이 그대로”라고 합니다. 서울 불광동 30평 단독주택을 8000만원에 전세 들어 사는 김 반장님은, 지금 짓고 있는 41평 아파트가 “내가 살 곳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돈 없는 건 걱정이 안 된다. 가족들 건강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 옆에 채아무개(40·첫번째 사진 맨 왼쪽) 형님은 언젠가 연속극에 나왔던 임꺽정 같은, 부리부리한 인상입니다. 목수 경력은 8년. 경기 안산에서 2500만원짜리 전세방에 살고 있습니다. 6살·8살·10살 아이들 교육비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20년 전 전북 전주에서 올라온 채 형님은 화물차 운전, 이삿짐 택배, 용달차 운전 등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돈을 모아 50평짜리 장어집을 열었는데, 그게 영 장사가 안 돼 1998년에 접었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이다보니 집에는 한달에 한번밖에 못갈 때도 많습니다. 지금은 서울 현장에 있어 그래도 1주일에 한번은 갑니다. 평일에는 찜질방에서 잠을 잡니다.

과묵한 임아무개(43·첫번째 사진 오른쪽 두번째) 형님은 고향이 충남 당진입니다. 고3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8년 동안 목공만 해온 ‘베테랑 목수’입니다. 임 형님은 “수입이 10년 전만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경기 부천시 역곡의 21평짜리 아파트에서 부인과 고등학생·초등학생 딸 둘과 함께 삽니다. 아파트 사는 데 5000만원을 대출했는데, 그게 걱정입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김아무개(39·두번째 사진) 형님은 17살 때 권투선수가 되려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권투를 배우면서 새벽에는 신문 돌리고, 밤에는 신설동 검정고시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위장병이 도지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습니다. “화류계”로 들어가 나이트클럽 웨이터 등을 하면서 18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 학교에 보내는 가정통신문에 아빠 직업을 쓰기가 “좀 그래서” 화류계 생활은 접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교 4학년·6학년입니다. 그 사이 분식집을 열기도 하고, 술집도 했는데, 다 “깡통” 됐습니다. “어디 사시냐”고 묻자 “성질 나는 얘기 묻지도 말라”고 합니다. 알고보니 용산구 신창동에서 18평 월세방에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시골에 나무집 지어 살고 싶습니다. 김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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