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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14 15:06 수정 : 2017.10.13 11:18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8일 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대륙간 탄도미사일급 ‘화성-14‘형 미사일 2차 시험발사를 실시했다고 2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정치BAR_노지원의 진토닉_북한 ‘불바다’ 번역기
1994년 YS때 첫 발언 이후 이명박근혜 정부서 10번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8일 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대륙간 탄도미사일급 ‘화성-14‘형 미사일 2차 시험발사를 실시했다고 2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새벽 2시, 북한이 “한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경고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해병대가 서북 도서에서 실시한 사격 훈련을 지적하며 “괴뢰군부호전광들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날뛰다가는 백령도나 연평도는 물론 서울까지도 불바다로 될수 있다는것을 명심하고 함부로 날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불바다’는 북한이 종종 사용하는 정치적·외교적 수사다. 신문기사 등 확인 가능한 공식 기록을 보면 1994년부터 지금까지 북한은 ‘불바다’라는 단어를 담은 대외 성명 또는 입장문을 모두 13차례 발표했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다른 국가들은 ‘불바다’라는 용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북한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 용어를 썼을까?

종교적 수사 ‘불바다’, 북한이 사용하니...

‘불바다’라는 단어의 유래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 등에는 지옥을 형상화하는 용어로 ‘불바다’ 또는 ‘불못’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원래는 종교적 수사였던 것이다. 북한은 이 용어를 혁명, 전쟁, 고난 등을 묘사할 때 사용했다. “지금은 불바다를 뚫고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된 조국을 되찾아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사회주의제도를 수립하고 그것을 건설하는 력사적 대업이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혁명투쟁 등 북한 근현대사를 소설로 재현한 장편소설 시리즈 <불멸의 역사> 가운데 1972년 권정웅이 펴낸 <1932년>에 ‘불바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때 불바다는 ‘적들과의 격렬한 싸움의 마당’을 뜻한다.

한국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불바다라는 말의 뜻이 수록돼 있다. 북한 조선말대사전의 풀이와 대동소이하지만, ‘적들과의 격렬한 싸움 현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 앞에 ‘북한어’라고 적어뒀다.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용어라는 얘기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불바다는 전쟁터를 의미한다”며 “북한이 다른 때보다 상황이 엄중하다는 것을 극단적, 과장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주 쓰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좀체 사용하지 않지만, 북한에서 종종 사용하는 또 다른 용어로 ‘피바다’도 있다. 김일성이 1930년대에 집필했다는 <혈해>를, 1960년대 들어 혁명가극 <피바다>로 새로 만들었다. 불바다니 피바다니 하는 용어들이 북한에선 전쟁, 혁명 등을 형상화하는 전형적 용어인 셈이다.

이 용어가 대외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북한의 ‘불바다’ 위협이 없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때 다시 등장해 박근혜 정부 때까지 약 9년여 동안 각각 5차례씩 모두 10차례 사용됐다. 지난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지금까지 북한은 두 차례에 걸쳐 ‘불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 가운데 한 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했다. ‘불바다’라는 표현의 빈도와 강도는 남·북한 정권의 변화와 미묘하게 맞물려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거요.” 1994년 3월19일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 회의에서 북한의 박영수 단장(오른쪽)이 했던 ‘폭탄 발언’은 전후 맥락은 사라진 채 방송 뉴스에 공개됐다. 그 뒤로 놀러 가는 것도, 주식시장이 안정세인 것도, 예비군 훈련에서 조는 것도 ‘안보 의식의 부재’라는 비판을 면치못했다. 1994년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 회의에서 만난 박영수 단장과 송영대 통일원 차관(왼쪽).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불바다론’의 시작: 북한 김일성 - 김영삼 정부 시절

북한은 1994년 3월 19일 남한을 향해 ‘불바다’라는 말을 처음 썼다. 남북 간 특사 교환을 위해 열린 8차 남북실무접촉에서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가 송영대 남쪽 대표에게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 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송 선생 쪽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경고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쪽에 “핵 문제를 우선 해결한다는 입장에서 특사를 교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서로 다른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던 가운데 북쪽 대표 입에서 ‘불바다’라는 말이 나왔다. ‘서울 불바다론’의 시초다.

다시 등장한 ‘불바다’: 북한 김정일 - 이명박 정부 시절

?이후 16년여 동안 북한은 ‘불바다’라는 표현을 대외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잠잠했던 ‘불바다’ 협박은 이명박 정부 들어 빈번하고 강도 높게 사용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6월 12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우리 군이 대북 심리전 확성기를 비무장지대 일대에 설치한 것을 일종의 ‘도발’로 여기고 ‘말 폭탄’을 날렸다. “우리의 군사적 타격은 비례적 원칙에 따른 1대 1 대응이 아니라 서울의 불바다까지 내다본 무자비한 군사적 타격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듬해인 2011년 2월 27일 북한은 다음날 있을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 연합 군사연습을 앞두고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성명을 냈다. 성명에서 북한은 “만약 침략자들이 ‘국지전’을 떠들며 도발해온다면 세계는 일찍이 알지 못하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전면전 대응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며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전략과 전술로 온갖 대결책동을 산산히 짓부셔버리는 서울 불바다전과 같은 무자비한 대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어 9개월 뒤인 2011년 11월 23일엔 ‘서울 불바다’가 ‘청와대 불바다’로까지 이어지며 긴장이 극대화됐다. 한국 군은 연평도 포격 도발 1주년을 맞아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곧바로 다음 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만일 또다시 우리의 존엄을 함부로 건드리고 신성한 영해, 영공, 영토에 단 한발 총포탄이라도 떨어진다면 연평도의 그 불바다가 청와대의 불바다로, 청와대의 불바다가 역적패당의 본거지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불바다로 타번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불바다’ 빈번: 북한 김정은 - 이명박 정부 시절

2011년 12월 17일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한 후 후계자로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이후 ‘불바다’ 발언이 더 빈발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군부대를 방문하거나 군사 훈련을 참관한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릴 때도 ‘불바다’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극단적 위기 상황에서만 등장했던 표현이 일상적 표현으로 전환한 셈이다.

2012년 8월 29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김정은 당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전선 지역 군부대 방문을 알리며 “지휘관들이 당장에라도 명령만 내리면 제일 먼저 서울부터 잿더미로 만들며 나아가서 원수의 아성을 모조리 불바다에 처넣음으로써 쌓이고 쌓인 천추의 한을 기어이 풀고야 말 경의를 다지었다”고 전했다.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된 1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치 2면에 함성을 외치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을 보도했다. 노동신문 연합뉴스

미국을 겨냥한 불바다: 북한 김정은 - 박근혜 정부 시절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북한의 ‘불바다’ 위협이 미국을 향했다. 2013년 3월 북한은 유엔의 대북제재 기류, 한미 합동군사 훈련 등에 반발해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며 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통해 "핵타격 수단으로 서울만이 아니라 워싱턴까지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10월 최윤희 당시 신임 합참의장의 발언 직후에도 북한은 ‘불바다’를 거론했다. 최 의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의 핵 공격이 임박하면 ‘선제 타격’하겠다고 말하고, 중부전선 지오피(GOP) 부대에 가서는 북의 도발에 도발 원점을 물론, 지휘 지원세력까지 응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월 21일 북한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경고한 바와 같이 괴뢰호전광들이 우리의 신성한 영공, 영해, 영토에 단 한 점의 도발의 불꽃이라도 튕긴다면 서울만이 아니라 온 남조선 땅이 불바다로 화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했으나 2016년 2월 23일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두고 북한 <로동신문>은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자” “청와대와 백악관을 잿가루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뒤이어 3월 2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국 공군의 북한 핵심 군사시설 타격 훈련을 거론하며 “무적을 자랑하는 우리 포병집단의 위력한 대구경방사포들도 박근혜가 도사리고 있는 청와대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격동상태에 있다···누르면 불바다가 되고 타격하면 잿가루가 되게 되여있다”고 엄포를 놨다.

같은해 12월 11일엔 <조선중앙통신>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청와대를 포함한 한국 특정 대상물들에 대한 타격방법을 확인하기 위한 전투훈련을 참관했다고 밝히며 “전투원들은 훈련을 통하여 연평도의 불바다를 기어이 청와대의 불바다로 이어 놓고 남조선 괴뢰들을 멸망의 구렁텅이에 영원히 처박아넣을 영웅적 조선인민군의원수 격멸의 투지와 용맹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고 선전했다.

트럼프로 옮겨간 ‘불바다’: 북한 김정은 - 문재인 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은 ‘불바다’ 표현을 사용하지 않다가 지난 8월 9일 북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시 한 번 ‘불바다론’에 불을 지폈다. 성명에서 북한은 “우리 식의 앞선 선제타격은 미국의 무모한 선제타격기도가 드러나는 그 즉시 서울을 포함한 괴뢰1, 3야전군지역의 모든 대상들을 불바다로 만들고 남반부 전 종심에 대한 동시타격과 함께 태평양작전전구의 미제침략군 발진기지들을 제압하는 전면적인 타격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만 그 표현은 한국 정부가 아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8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더 이상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세계가 보지 못했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고, 이날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미국의 장거리전략폭격기 B-1B ‘랜서’ 2대가 한반도 상공을 날기도 했다.

북한 정권별로 보면, 대외적 성명·입장 등에서 ‘불바다’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김정은이다. 김일성 시절 1차례, 김정일 시절 3차례 사용한 것과 비교해 김정은 시절의 북한 당국은 이미 9차례나 ‘불바다’라는 표현을 썼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그만큼 (전략자산 등 측면에서) 자신감이 올랐다는 방증”이라며 “(빈번한 ‘불바다’ 표현을) 김정은 개인적 성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자극적 용어로 대남·대미 비난에 열을 올리는 것은 김정은 개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핵탄두 소형화, 대륙간탄도미사일 아이시비엠(ICBM) 개발 성공 등에서 나오는 자신감에서 비롯한 게 아니겠느냐는 의미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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