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노지원의 진토닉-사회학자·언론학자·정치학자가 본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지난 7월24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공식 출범할 때부터 세 달 동안 공론화위 취재를 맡았던 정치부 노지원 기자입니다. 그동안 공론화위가 걸어온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자료집의 공정성을 두고 한 쪽이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고, 토론회 발표자를 두고 중단, 재개 양 쪽이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시민대표참여단 471명은 한 달 동안의 숙의과정을 잘 마쳤고 최종조사에 임했습니다. 공론화위는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결론 도출뿐 아니라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 방향에 대한 시민참여단의 의견까지 수렴해 권고안을 냈습니다. 공론화가 성공적이었다는 평이 많지만, ‘공론화 그 후’가 더 중요해보입니다. 이번 ‘실험’이 한국 사회에 남긴 과제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치학자에게 이번 공론화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인지, 어떤 과제가 남았는지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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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2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 방침과 에너지전환(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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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위원장 김지형)가 시민대표참여단 471명의 이름으로 작성한 권고안을 정부에 전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서면 메시지를 내고 “숙의 과정을 거쳐 지혜롭고 현명한 답을 찾아주셨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하는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하며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들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차 조사서 ‘모르겠다’던 36% 유보층, 숙의 후 3%로 줄어시민참여단 93% "결과 어떻든 존중하겠다"공론화 과정 만족도 평균 87점…재개 쪽, '경제성' 프레임 강조 "경쟁 가능했던 프레임 대결인지 의문…'공정한 기회' 주어졌는지 검증해야""공론조사 만능론은 위험…결정 책임 정부에 있다는 점 분명히 해야""이벤트성 숙의 아닌 일상적 숙의 시스템 필요"
24일 정부는 권고안에 따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후속조치 및 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했다. 앞으로 백서 발간,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공론화 전 과정을 기록·관리하고, 이번 공론화 경험을 다른 사회 갈등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공론조사 표준 매뉴얼’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론조사 기법을 통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중단, 재개 쪽 요구를 큰 틀에서 아울렀다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번 공론화가 남긴 한계와 과제도 적지 않다. 산적해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번 공론화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겨레>는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치학자에게 이번 공론화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위원으로 직접 참여한 김원동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와 정치커뮤니케이션 전공인 민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정치학을 전공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박사)이 이번 공론화의 성과와 한계,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애정어린 분석을 해줬다.
유보층 급감, ‘새로운 의견’의 탄생
이번 공론화의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는 ‘모르겠다’는 의견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점이다. 민영 교수는 특히 시민참여단이 2박3일 합숙토론을 거친 뒤 유보층이 사라지고, 어느쪽으로든 의견 형성이 이뤄졌다는 대목에 대해 평가했다. 실제로 1차 조사에서 35.8%였던 유보 의견은 3차에서 24.6%로 줄었고, 합숙토론 이후인 4차 조사에서 3.3%로 크게 감소했다. 그는 “공정한 토론 기회를 갖고 다양한 의견에 노출되는 게 숙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숙의가 의견 형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 교수는 “특히 20대 의견 추이가 흥미롭다”고 했다. 1차 조사 때 20대는 유보 의견(53.3%)의 비중이 모든 연령층 가운데 가장 많았다. 이는 4차조사(5.2%)에서 급격히 줄었다. 20대는 유보뿐 아니라 재개 비율(1차 17.9%→4차 53.1%)도 가장 많이 늘어난 집단이다. 중단 의견(1차 28.9%→4차 41.7%)도 늘긴 했지만 재개 의견이 큰 비율 차이를 내며 다수 의견이 됐다. 민 교수는 “초반에 판단 유보가 많았다는 것은 이슈에 대한 지식이나 관여도가 낮았다는 이야기인데, 숙의과정을 통해서 이슈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며 “일반적으로 20대의 경우 진보적 이념 성향이 더 강하다. 곧, 자신의 성향은 어쩌면 진보적일 지 모르지만 숙의과정에서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쪽으로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이념적 이유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 좀 더 풍부한 정보, 다양한 의견에 노출되는 게 합리적 의견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라고 평가했다.
김원동 교수도 같은 대목에 주목했다. 그는 “일반 여론조사에서 유보라는 건 ‘더 생각해보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잘 모르겠다’는 의미가 크다”며 “(원전 이슈처럼) 일반인이 익숙하지 않은 주제로 조사를 할 때는 유보가 많아지면 정확히 어느 쪽이 우세한지 알기 어렵다. 이런 주제일 때 숙의를 통해 정보를 주면 판단의 근거 자료가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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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13일 저녁 충남 천안 교보생명연수원에서 열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종합토론회 개막식 현장. 시민참여단 471명은 13∼15일 2박3일 동안 합숙토론을 했다. 천안/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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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과 달라도 결과 받아들이겠다”…숙의 결과 수용성 높아
이번 공론조사 결과 가운데 결과에 대한 수용성과 공론화 과정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점도 눈에 띈다. 결과 보고서에서 ‘최종 결과가 본인 의견과 다르게 나왔을 때 이를 얼마나 존중할 지’에 대한 시민참여단의 응답을 보면 93.2%가 존중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렇게 수용도가 높은 이유는 시민참여단이 공론화 과정 전반에 대해 만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공론화 과정의 공정성, 민주성이 결과에 대한 수용 정도의 높고, 낮음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분임토의에서 내 의견을 열심히 전달했는지 △타인의 의견을 잘 들었는지 △의견 교환이 잘 이뤄졌는지 △토의가 공정하게 이뤄졌는지 △상호존중 태도로 토론했는지 등에 대한 최종조사 응답을 통해 분석한 공론화 과정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분임토의 만족도는 6.16점(7점척도)으로, 100점으로 환산하면 88점이다. 또한 공론화 과정 전반에 대한 만족도는 평균 6.12점(7점 척도)으로, 100점 만점에 87.4점이 나왔다.
이에 대해 민 교수는 “내 의견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내 의견이 반영됐다’, ‘상대방의 의견도 근거가 있다’는 이해가 있기 때문에 관용할 수 있다. 숙의를 하면 개인적 차원에서 정보를 얻는 유익함뿐 아니라 ‘시민적 덕성’이라는 태도가 길러진다. 결과를 수용하게 되고 향후에 이런 여론 형성 과정에서 ‘방관하는 시민’이 아닌 ‘참여하는 시민’이 되는 성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종조사 결과를 보면 중단 쪽을 택한 사람들의 공론화 과정 만족도(7점 만점에 6.31점)가 재개 쪽(6점)보다 높았다. 이에 대해 민 교수는 “예상해보건대 중단 쪽은 분임토의 등 숙의과정 속에서 자신이 다수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을 수 있다”며 “그럼에도 공론화 과정에 만족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본인이 다수 쪽이라면 결과에도 만족할 가능성이 높은데 소수의견이라고 해도 발언할 기회, 남의 의견을 들을 기회 등이 있었다는 점이 합의 결과에 대한 수용성을 높인다”라고 했다. 최종 조사에서 ‘중단’을 택한 시민참여단 최지혜(44)씨는 “실제로 합숙토론 현장에서 분위기가 재개 쪽으로 기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서도 “공론화위가 과정을 공정하게 하려고 준비를 많이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결과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 교수는 이러한 결과가 승자독식 패턴에 재성찰이 필요함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2박3일 합숙토론을 통해 결과 수용도가 높아졌다고 본다”며 “이를테면 대면적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토의의 수준, 합의의 수준은 비대면적 관계의 그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대면적 관계를 맺어서 갈등을 푸는 방식은 모든 분야에서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이어 “재개 쪽으로 결정이 났지만 환경단체, 시민단체 쪽에서 수용하겠다고 하는 것은 원전 정책 축소 방향에 대한 어느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점이 권고안에 포함됐기 때문”이라며 “갈등 해결에 있어서 상대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선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구체적인 결과여야 한다. 이런 갈등해결 방식은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고, 당사자뿐 아니라 광의의 이해당사자까지 수용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된다”고 했다.
한편 서복경 박사는 ‘정보의 확산’ 측면에서 이번 공론조사가 유용했다고 평가했다. 서 박사는 “여론조사처럼 A냐 B냐를 선택하도록 하지 않고 공사를 재개해야하는 논거, 중단해야 하는 논거가 명시적으로 제시됐다. 주장에 대한 세부 논거, 곧 내가 왜 찬성하고 반대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항목이 포함됐는데, 이를 통해 공론조사 참여자뿐 아니라 공론조사를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정보가 확산된다”고 분석했다.
“신고리, ‘거리두기’되는 주제라 성공”
이번 공론화는 특히 주제의 특성 때문에 ‘절묘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서 박사는 “원전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최근에 핵심 의제로 부상한, 곧 ‘생성기’ 이슈라 공론조사를 통해 도움 받을 수 있었다”며 “하지만 모든 이슈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모델은 아니다. 사실 대의제가 잘 작동되기 위해 직접 민주주의적 수단을 도입한 게 처음도 아닌데 마치 여론조사보다 우월하고, 다른 협치모델보다 우월하니 앞으로 모든 건 공론조사로 하는 게 좋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가장 바람직한 여론형성 도구란 있을 수 없고, 더 중요한 건 이들 도구를 얼마나 신중하게 사용하고, 그 결과를 해석하느냐란 얘기다. 서 박사는 공론조사 방법론에 대해 “논리적 단계가 복잡한 이슈일 때도 효과적이다. 추상적인 제도 이슈, 사회적 논의가 막 시작된 생성기 이슈, ‘아직 갈 길이 먼’ 이슈에 적합하다”고 덧붙엿다.
실제로 에너지, 원전 문제가 ‘전국적’ 이슈로 떠오른 건 지난 대선부터다. 탈핵을 주장하는 시민단체들은 각 후보 캠프를 찾아 탈핵을 공약에 넣어줄 것을 요청했고, 5명 가운데 4명의 후보자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논의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서 박사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어떤 에너지를 선택해야하느냐는 아젠다가 등장한 게 최근”이라며 “한국수력원자력이나 원전 인근 주민은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전국민이 스스로를 이해당사자로 여기고 있진 않다”고 했다. 이어 “예컨대 최저임금을 두고 공론조사를 했다고 하자. 그 결과가 이번처럼 쉽게 수용이 될까. 최저임금은 전국민이 이해당사자인 주제다. 따라서 최저임금을 가지고 공론조사를 한다면 결과에 대한 수용도가 이번 처럼 높기 힘들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에너지 정책은 전국민의 삶과 연결되는 주제이지만, 일반 시민들이 자신의 삶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최저임금 등 다른 이슈보다는 약해 ‘거리두기’가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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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공론조사 결과에 따라 정부에 '건설 재개'를 권고한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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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등 대안 논리, ‘경제성’ 프레임 극복 어려워
민 교수는 “경쟁이 가능했던 프레임 대결이었는지 의문”이라는 점을 공론화의 한계로 들었다. 그는 “결과의 차이를 부른 것은 안전성, 환경성이 아니라 신고리 5·6호기와 관련한 경제성 문제다”라며 “‘경제 프레임’을 들고 나온 재개 쪽을 안전성, 환경성 프레임을 갖고 나온 중단 쪽이 이기기가 다소 역부족이었다”고 분석했다. 실제 시민참여단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재개 쪽이 경제성 논리를 내세운 대목을 짚은 바 있다. 익명을 요청한 시민참여단 김아무개(45)씨는 “(건설 재개 쪽에서) 신고리 5·6호기를 건설하지 않으면 당장 원전 기술이 쇠퇴하고 수출길이 막힌다고 주장했다”며 “왜 저렴한 원전을 놔두고 비싼 신재생에너지를 하려고 하느냐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공론화위가 낸 최종 보고서에서 시민참여단 최종 판단 결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보면 안전성, 환경성은 중단, 재개 쪽 모두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7점 척도로 봤을 때 안전성에 대한 인식이 재개(6.6점), 중단(6.8점) 쪽에서 큰 차이가 없었고, 환경성에 있어서도 재개(6.2점), 중단(6.4점) 쪽이 비슷하다. 그런데 전기요금(재개 6.0점, 중단 5.2점), 전력공급 경제성(재개 6.4점, 중단 5.4점), 지역 및 국가 산업(재개 6.2점, 중단 5.6점) 측면에서 재개 쪽은 이들 요인을 중단 쪽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민 교수는 “어떤 이슈에 관해서든지 경제 프레임에 대항하는 프레임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중단 쪽 경제 논리를 뛰어넘을 만큼 설득력있는 대항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인데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민 교수는 “언론이 경제성 논리에 대해 사실검증을 하면서 실제 그 논리가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중단, 재개 양 쪽이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가운데 논리를 폈는지는 검증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계는 눈 앞에 놓인 신고리 5·6호기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더 장기적인 원전 이슈를 둘러싼 갈등은 사실상 해결이 안 됐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평균을 내면 원전 축소 의견이 53.2%로 가장 높았지만, 여전히 원전을 유지(35.5%)하거나 확대(9.7%)하자는 의견이 45.2%나 된다. 특히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쪽에서는 84%가 원전 축소를 희망했지만, 재개 쪽에서는 32.2%만이 축소를 원했다. 이에 대해 민 교수는 “탈원전을 둘러싼 본질적 갈등을 해소하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전체적으로 50% 이상이 축소를 원했다는 것이 의미없진 않지만 누가 이 50%를 구성하느냐도 중요하다. 원전 정책에 대한 중단, 재개 쪽의 태도가 극명히 갈린다”고 지적했다. 합의가 이뤄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갈등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공론화, 갈등해결 ‘만능 도구’될 수 없어”
정부는 24일 “이번 공론화의 경험을 향후 다른 사회갈등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공론조사 표준 매뉴얼을 개발하는 등 사회갈등 해결모델을 정립하겠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공론화를 정책 결정을 위한 ‘만능 도구’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 박사는 “‘모델’이라는 건 일종의 표준화된 플랫폼을 가지고 보편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라며 “‘공론화 모델’을 정책 결정의 보조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항상 이런 방식으로 정책 결정을 할 순 없다. (시민에게 전적으로 결정을 맡겨) 정책의 결과에 따라오는 책임을 묻기 어려운 건 치명적인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공론조사 결과를 참고하고 존중한 정책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그 주체가 모호해지면 유권자는 선거를 통해 책임 소재를 묻기 어렵게 된다는 얘기다.
서 박사는 “대의제에도 주민참여예산제 등 여러가지 민간 협치기구가 있다”며 “이들을 활용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추세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 즉 선출된 공직자가 모든 것을 공론조사에 맡기겠다고 한다면 이는 무책임하다. 모든 책임은 정책 결정자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공론조사를 통해 신고리 5·6호기를 재개하기로 한 것도 시민이 판단하긴 했지만, 그로 인한 책임은 정책 결정자가 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훌륭한 여론 수렴기법이라도 모든 이슈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모델이 될 순 없다는 지적이다. 서 박사는 이어 “공론조사가 마치 여론조사나 다른 협치모델보다 우월하니 앞으로 모든 건 공론조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식의 일반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 좋겠다”며 “향후 공론조사로 여론을 수렴하더라도 조사 결과를 어떤 수위로 반영할 지 섬세한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공론화에 대해 “대의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서 박사는 “대의제와 다양한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진 여론수렴 수단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미 많이 하고 있다. 예컨대 법률로 보장된 노사정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에도 민간 대표들이 직접 참여한다. 선출직 아닌 사람들도 정책 결정에 영향력 행사하는 예다. 다만 이때에도 정책 결정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일상적 숙의’ 이뤄지는 시스템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번처럼 공론조사라는 기법을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러운 숙의가 가능하도록 구조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 박사는 “일상적 숙의가 가능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결사의 자유, 시민들의 정치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는 것이다”라며 “일상적인 결사가 가능하려면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직능협회, 부녀회, 상가번영회, 동네 지구당 등 일상적으로 정치 정보를 교류하는 단체가 자유롭게 구성돼야 한다. 구성원과 늘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구나’ 정정할 수 있는 숙의가 생활공간에서 이뤄지도록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노조할 권리를 외쳐야 하는 상황이고, 당원이 1000명 있어야 정당을 만들 수 있는 게 우리 현실”이라며 “이런 것들이 일상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해 숙의를 방해한다. 한국에는 형법상 명예훼손, 공직선거법상 후보자 비방 등 일상적으로 시민 입에 제갈을 물리는 제도도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론이나 모델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치 활동의 자유 확보가 더 긴급하다는 분석이다. 서 박사는 “이런 일상의 문제가 부상되지 않고 특정 이슈에 대해 몇몇이 참여하는 게 ‘숙의 민주주의’라고 하면 더 긴급한 문제가 사라지게 된다. 일상 속 숙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정상화 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벤트성 숙의 민주주의보다는 숙의를 일상으로 확대할 방법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민 교수는 공론화 이후 언론과 정당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들이 ‘숙의 공간’을 제공해야한다는 얘기다. 민 교수는 “정치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여론 형성, 참여 과정으로 편입되는 효과를 내야 한다. 미디어와 정당도 모두 숙의 공간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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