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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27 11:19 수정 : 2017.12.28 12:45

[역사 속 오늘]
1972년 12월 27일 박정희 정권 ‘유신헌법’ 공포

“국민투표에 부쳐진 유신 헌법안이 투표율 91.9%에 찬성 91.5%, 반대 7.6%로 확정됐다 .”

<경향신문> 1972년 11월 22일치.
45년 전 오늘,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됐습니다. 앞서 그해 11월 21일 언론에서는 유신 헌법안에 대한 국민 찬반투표에서 사상 최고인 90%가 넘는 압도적인 찬성 의견이 나왔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박정희가 주도한 두 번째, 헌법 제정 이후 일곱 번째 개헌이 이뤄졌습니다.

“나는 이 헌법 개정안의 공고에 즈음하여 이 땅 위에 한시바삐 우리의 실정에 가장 알맞은 한국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올바른 헌정질서를 확립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 ”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유신헌법’ 제정을 선언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유신 헌법안에 대한 국민 찬반투표를 한 달 정도 앞둔 1972년 10월 27일, 박정희는 특별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한국적 민주주의 정착’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법권에 대한 제약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그가 꿈꿨던 ‘영구집권’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처였습니다. 박정희의 정치적 야욕을 고스란히 품은 ‘유신헌법’의 내용을 통해 그의 ‘헌정질서 파괴 행위’들을 짚었습니다.

체육관에서 99.99% 찬성률로 제8대 대통령 선출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 개헌 후 계엄령 발표. <한겨레> 자료 사진.
특별 대국민담화 열흘 전인 1972년 10월 17일, 이미 9년째 장기집권 중이었던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선포합니다.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법적 장치가 되어 줄 헌법 개정이 이유였습니다. ‘10월 유신’이라 이름 붙인 비상조치로 인해 국회는 해산되고, 정당 활동은 금지됐습니다. 전국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뒤이어 헌법 개정안에 대한 심의와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공고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열흘,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습니다.

1972년 11월21일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하는 김종필(오른쪽). <한겨레> 자료 사진.
‘유신헌법’에 따라 꾸려진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선거인 수 전원인 2359명이 투표한 가운데 무효표 2표를 제외한 2357표, 99.99%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박정희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 당선의 순간이었습니다.

<경향신문> 1972년 12월 27일치(왼쪽), 같은 날 박정희는 장충체육관에서 8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선다. 사진(오른쪽)은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총리 김종필이 유신헌법 공포식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7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제8대 대통령 취임 선서와 함께 ‘유신헌법’을 공포합니다. 박정희의 뜻대로 ‘유신헌법’으로 인해 대통령 간선제(임기 6년)와 연임 제한 철폐로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유신헌법의 내용적 불법성

‘유신헌법’의 핵심은 불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헌법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독재정권의 권력 확대 근거와 장기 집권에 대한 욕망을 담았습니다. 모두 12장 126조 11조의 부칙으로 개정된 ‘유신헌법’의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부 , <유신헌법 > 공포 (1972. 12. 27)

대한민국 헌법

제 3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제 36조

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의원으로 구성한다 .

②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수는 2,000인 이상 5,000인 이하의 범위 안에서 법률로 정한다 .

③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 .

제 37조 ( …… )

④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

제 39조

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 .

제 40조

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한다 .

② 제 1항의 국회의원의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며 ,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붙여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당선을 결정한다 .

제 4장 대통령

제 47조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

제 53조

① 대통령은 천재 ·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

② 대통령은 제 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

제 59조

①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

제 6장 국회

제 77조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 다만 ,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거한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 .

제 82조 ( …… )

③ 국회는 정기회 ·임시회를 합하여 년 150일을 초과하여 개회할 수 없다 .

부칙 <제 8호 , 1972. 12. 27 >

제 9조 1972년 10월 17일부터 이 헌법 시행일까지 대통령이 행한 특별선언과 이에 따른 비상조치에 대하여는 제소하거나 이의를 할 수 없다 .

제 10조 이 헌법에 의한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 .

1972년 12월27일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신문협회와 방송협회 산하 언론사들은 일제히 ‘개헌안에 대한 성명서’를 1면 사고로 실어 지지·찬양했다. 사진은 그해 12월28일치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서울시내 세종로 네거리에 내걸린 ‘8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축하’ 아치. <한겨레> 자료 사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 꿈꿨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후보자를 일괄 추천하게 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법률을 개폐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쥐고 재판조차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막강한 권한도 챙겼습니다. 거기에 더해 ‘헌법적 효력을 가진 특별 조치’인 긴급조치를 통해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초법적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명령’이 곧 법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법제화한 것입니다.

반면, 국가 권력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없게 한 조항은 삭제했습니다. 또한 회기의 단축과 국정감사권의 부인 등으로 국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국회는 대통령에 종속되게 했습니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 또는 보직하거나 파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도 부정했습니다. 이로써 박정희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제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정희와 헌법 개정

박정희 군사정권은 쿠데타를 통해 생겨나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제정 등을 통해 독재를 감행하였다. <한겨레> 자료 사진.
박정희의 헌법 개정은 앞서 말씀드렸듯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주도한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독재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박정희는 1962년 3월 23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12월 27일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습니다. 그는 1969년 10월 21일 대통령의 3선 금지규정을 없애고, 12년 연속 연임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른바 ‘3선 개헌’입니다. 아울러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요건은 강화하고, 대통령 권한강화의 연장선상에서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은 허용했습니다.

한 차례 개헌을 통해 이미 9년째 장기집권을 해오던 그였지만 ‘영구집권’을 위해서는 ‘3선 개헌’보다 더 강력한 조처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3년 만에 다시 꺼내든 것이 ‘유신 개헌’의 추진이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1974년 10월 서울 광화문에서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하는 한국신학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보도사진연감>.
박정희는 유신 7년 동안 9번의 긴급조치를 선포하며 국민에게 절대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긴급조치 1·4호의 경우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해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국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사법살인’의 근거였습니다.

1975년 4월 8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 등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대표적인 사건이 1975년 4월 9일 일어난 ‘인혁당 사건’입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 학생연맹) 관련자 8명에 대해 법원 선고가 내려진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씌운 혐의는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련자들의 혐의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데다 조사 과정 중 고문 사실까지 밝혀졌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 협회는 그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법살인 대법원 사형확정 판결. 1975년 4월 8일 <한겨레> 자료사진.
8명의 억울한 국민이 희생된 지 27년이 지난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당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에게까지 사건을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유신정권의 용공조작’이라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통해 헌정 질서를 파괴함은 물론, 군사독재 등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참고문헌

<대통령 기록물 목록집 박정희대통령 문서편 >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유신을 말하다 > 학술단체협의회 기획 , 배성인 외 공저

<박정희 , 파멸의 정치공작 > 이상우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 성공회대 민주화운동 자료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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