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22년 전인 1896년 1월 1일
대한제국 서양식 역법인 태양력 채용
고종 32년 9월 9일 (병오 ) 력법을 개정하여 태양력을 사용하되 개국 504년 11월 17일로써 개국 505년 1월 1일로 삼으라고 조칙을 내리다 . 이와 함께 각국 사신에게 이를 통고하다 .
-고종실록 고종 32년 9월 9일
122년 전 오늘, 1896년 1월 1일은 대한제국이 완전한 서양식 역법인 태양력을 처음 채용한 날이다. 태양력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번 도는 주기를 기준으로 만든 역법으로,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과는 상반되는 역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태음력을 사용해왔지만, 조선 시대 후기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태양력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1896년부터 사용된 태양력은 대한제국이 서구 중심의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태양력 시행은 백성의 편의보다 여러 정치적 배경이 계기가 됐다. 개혁 과정에서 일어난 결정적 사건들을 통해 그 내용을 짚었다.
개화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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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시기 변발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청나라 포로를 별기군 차림의 조선 병사가 감시하고 있다. 1894년 체결된 조일양국맹약에 따라 조선은 일본군을 위해 인력과 시설을 제공하고 포로 감시도 해주었다. 외교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1868~99 일록 20세기>(고단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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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일어난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동아시아 정세는 급격한 변환점을 맞았다. 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정치·문화권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동아시아 질서가 마침표를 찍게 됐다.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막강한 영향력 속에 정치와 군사, 재정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수난을 겪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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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머물고 있던 경복궁 건청궁의 옥호루.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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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1대 황제였던 고종과 정비인 명성황후는 일본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반발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아울러 고종은 감금 조처했다. 이후 일본은 온건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김홍집 내각으로 내각을 개편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우선 감금된 고종의 국정 간여를 배제했다. 반면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에 적극 간섭했다.
이 급진적인 개혁이 바로 을미개혁이었다.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은 태양력 사용을 비롯해 단발령 도입과 독자적 연호 사용 등 140여 건의 법령을 골자로 하는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이었다.
태양력 도입 목적
실제 태양력은 1896년 1월 1일 치로 공포됐지만, 외교문서에서는 이미 태양력이 사용되고 있었다. 앞서 1653년부터 200여 년간 사용해오던 역법인 시헌력은 중국에서 서양 역법을 기초로 편찬한 역법이었다. 조선은 1876년 한일수호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200여 년 동안 문제없이 사용되던 시헌력이 더 이상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힘든 상황에 처한다. 거기에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 역시 일본이 사용하고 있던 서양 중심의 역법 질서에 급격히 편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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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직후(1895년) 남산의 일본공사관 주변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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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1876년 한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20년 동안 태양력의 사용은 외교문서에 국한된 것이었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역법은 여전히 시헌력이었다. 그러나 김홍집 내각을 내세운 일본은 대한제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국가 공식 역법도 일본과 같은 태양력으로 바꾸었다. 훗날 조선을 침략했을 때를 대비해 사회 체제를 일본과 동일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태양력 도입과 사회적 변화
1896년 1월 1일 김홍집 내각의 태양력 공포와 함께 관청과 궁중에서는 모두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양력을 세운다”는 의미의 ‘건양’이라는 새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서양의 요일 주기는 관청의 근무 시간을 변하게 했다. 일요일은 전일 휴가이며, 토요일은 정오 12시부터 쉰다고 표기했다. 이런 서양의 요일 주기로 인해 일상에서 빚어지는 시간의 주기에는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날짜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태양력의 도입에 따라 국가의 소식지인 관보가 양력으로 발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달력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태양력 사용을 위해 달력을 팔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양의 요일 주기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도 점차 확산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는 국제질서에 맞춘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의도대로 맞물려 흘러간 것이기도 했다.
백성들의 반응
하지만 친일 내각이 백성들에게 단발령을 강제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다. 단발령을 계기로 친일 내각의 을미개혁이 이념적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게 됐다. 앞서 언급한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고조된 반일적인 사회 분위기가 단발령으로 인해 더욱 악화한 것이다. 친일 내각과 그 배후 세력인 일본에 대한 분노는 백성들의 강한 반발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는 유생들이 주도해 친일 내각을 응징하기 위한 무력 투쟁인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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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하기 전 고종의 모습(왼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일본에 의해 강제 단발을 한 고종의 모습(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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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고종의 아관파천이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신변의 안전과 조선을 침입하는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아관파천 전까지 고종은 이미 실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의한 감금과 단발령 강요 등으로 군주로서의 권위도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아관파천은 외국 공사관에 의탁해서라도 불리한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던진 고종의 승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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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옛 러시아공사관의 1890년대 모습. 중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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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 내각 김홍집과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과 정병하, 어윤중 등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친러파 세력이었던 이완용과 이범진 등이 중심이 된 새 내각이 구성됐다. 고종은 단발령을 폐지하고 지방 행정구역의 13도 환원 등을 골자로 한 갑오개혁도 무효로 했다.
태양력·태음력의 혼용
국민들은 양력이 도입된 이후에도 명절 때는 여전히 음력인 시헌력을 사용했다. 이런 상황은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날짜는 태양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명절이나 제사일 등을 특정 음력 날짜에 맞춘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대체로 정월이란 것은 나라에서 첫 번째 힘써야 할 달입니다… (중략 ) 어찌 한 개 나라 안에서 두 가지 정월달을 쓸 수 있겠습니까… (중략 ) 무엇 때문에 양력 월일을 섞어 쓰면서 마침내 정월달로 하여금 정한 것이 없어 나라의 체모에 손상을 주고 민심을 현혹시키는 것입니까… (중략 )
-고종실록 권 36, 고종 34년 12월 21일
양력이 사용된 지 1년이 지난 1897년 중추원이등의관이었던 지석영이 올린 “한 나라에 정월이 두 개일 수 없다”고 주장한 상소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1898년부터 사용한 명시력은 음력인 시헌력에 양력인 태양력이 첨가된 과도기적 형태를 띠게 됐다. 명시력은 1898년부터 1908년까지 11년 동안 사용됐다. 태양력을 시행했다가 또다시 음력인 시헌력을 병용하는 체제로 돌아간 데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변동이 작용했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 이외에도 시헌력인 음력과 태양력인 양력 간의 날짜가 한 달 15일 정도나 나는 큰 격차가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태양력 사용에 대한 국제적인 분위기를 어길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1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두 역법을 섞어 쓰는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콘텐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종시대사 3집 >
<대한제국기 태양력의 시행과 역서의 변화 > 정성희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 / 강성현
<조선의 왕과 신하 , 부국강병을 논하다 >/ 신동준
<한국 근대사 산책 > / 강준만
<한국사를 보다 > / 정호일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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