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4 11:29
수정 : 2018.01.04 14:24
[역사 속 오늘] 165년 전 오늘, 1853년 1월 4일
솔로몬 노섭 12년 간의 노예생활 끝에 탈출
흑인들 사회적 억압에 맞선 저항 운동으로 이어가
“나는 노예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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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해방의 기폭제가 된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떠올리게 하는 <노예 12년>은 솔로몬 노섭이 쓴 자전적 소설이 원작이다. 정공법으로 노예제도의 참상을 그려내는 이 영화는 수백년 동안 노예제도를 존속시켜온 인류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프레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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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미국 뉴욕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비올리스트 솔로몬 노섭은 어느 날 낯선 백인들에게 공연 제안을 받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공연 뒤 저녁 식사를 마친 노섭은 갑자기 정신을 잃게 된다. 다음날 불법 노예 수용소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마취에서 깨어난 노섭은 곧 노예 제도가 있는 주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은 루이지애나 주로 팔려가게 된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서 인권모독과 무자비한 폭행을 감내하며 12년 동안의 노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상은 솔로몬 노섭의 자서전 <12년 간의 노예생활>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노예 12년>(한국 2014년 개봉) 내용의 일부다. 책과 동명의 영화는 주인공이 직접 겪은 실화라는 점에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165년 전 오늘, 1853년 1월 4일은 솔로몬 노섭이 12년 동안의 끔찍한 노예 생활 끝에 극적으로 탈출한 날이다. 노섭은 노예 탈출 뒤 흑인 인권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이런 그의 삶은 사회적 억압에 맞선 흑인들의 저항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미국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은 1820년 자유 주와 노예 주의 세력균형 유지를 위해 남·북 지역이 타협을 한다. 이 협정이 ‘미주리 개혁’이다. 남·북이 타협한 결과,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북쪽은 노예제가 금지된 자유 주, 남쪽은 노예제가 허용된 노예 주가 된다. 문제는 이에 앞선 1808년 미국에서 노예 수입이 불법으로 규정되면서 농장주들이 노예 수급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노예 인신매매가 횡행하게 된다. 솔로몬 노섭에게 공연을 미끼로 접근한 뒤 노예 수용소에 팔아넘긴 이들 역시 노예 인신매매꾼들이었다.
12년 동안의 노예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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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해방의 기폭제가 된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떠올리게 하는 <노예 12년>은 솔로몬 노섭이 쓴 자전적 소설이 원작이다. 정공법으로 노예제도의 참상을 그려내는 이 영화는 수백년 동안 노예제도를 존속시켜온 인류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프레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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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노섭은 ‘플랫’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혹독한 노예생활을 견뎌야 했다. 끊임없이 구타를 당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노섭은 자유를 향한 희망만큼은 버리지 않는다.
전망대 건설 작업을 하게 된 노섭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캐나다 출신의 백인 목수 사무엘 베스와 친구가 된다. 노섭은 자신이 납치당한 이야기를 베스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뉴욕 주 새러토가 스프링스로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던 노섭에게 베스는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베스는 너무 위험하다며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결국은 노섭이 부탁한 편지를 전해주기로 한다.
노섭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통해 노섭의 지인은 지역 보안관과 함께 노섭을 찾아온다. 농장 주인과 함께 있던 노섭에게 보안관은 뉴욕에서 온 ‘자유인’의 신분이 맞는지 물어본다. 농장 주인은 노섭이 자신의 노예라고 주장하지만, 보안관과 함께 온 노섭의 지인은 농장 주인을 막아서고 그의 탈출을 돕는다. 이들과 함께 마차에 올라탄 노섭은 함께 일하던 노예 팻시와 마지막 포옹을 나눈 뒤 그곳을 떠난다.
베스의 도움으로 노섭은 12년 동안의 노예생활 끝에 극적으로 탈출해 자유를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이날이 바로 1853년 1월 4일이었다.
흑인은 백인에게 반하는 증언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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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현재 노예와 관련된 서류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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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생활 동안 아무도 노섭이 노예가 아니라는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가 자유인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 연락이 닿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농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조차 숨겨야 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노섭은 자신을 팔아넘긴 노예 인신매매꾼들을 고소했지만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 D.C의 법을 보면, 흑인은 백인에게 반하는 증언을 할 수 없었다. 증언 없이는 민사상 고소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사실상 흑인에게 불리한 악법이었던 셈이다.
흑인 인권 운동의 시작
솔로몬 노섭은 탈출 이후에 자서전 <12년간의 노예생활>을 출간했다. 이 책은 1853년 출간 당시 2만 7000 여부가 판매되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노섭은 책 출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예 인권 활동가로 활약했다. 그는 강연과 연설을 통해서도 노예제도의 야만성을 알리며 폐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하던 노예 해방을 위한 비공식 조직인 ‘지하철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인 인권을 향한 노섭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을까? 1860년 미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을 통합하는 의미에서 1863년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20세기 들어서는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흑인 해방 운동이 조금씩 주목받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가혹했다. 실제 노예제도는 폐지됐지만 흑인들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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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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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건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다. 링컨이 노예제도 폐지 선언을 한 지 95년이 지난 1955년 12월 1일, 미국 오하이오주 몽고메리 시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체포되어 쫓겨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체포된 이유는 단지 백인 남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몽고메리 시는 버스 앞 네 줄을 백인 전용 좌석으로 지정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은 이 자리를 제외한 뒤쪽에 앉을 수 있었다. 또한 백인 전용 좌석이 만석일 경우에는 흑인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버스가 만원이 되면 타는 순서에 상관없이 흑인들이 내려야 했다. 당시 버스 이용객들의 75%는 흑인들이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제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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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28일 미국 워싱턴의 잔디광장에 모인 25만명의 평화행진 참가자들 앞에서 킹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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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파크스 체포 사건은 흑인 사회에 이른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으로 몽고메리 지역의 흑인들은 집단 파업과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1955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 13일까지 보이콧을 지속하며 흑백 분리주의에 따른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이때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이 운동에 동참했다. 킹 목사는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끌었다. 이 운동이 1년 만에 승리로 끝나면서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됐다. 킹 목사가 인권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노예 12년>도 흑인 문학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솔로몬 노섭의 오디세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고, 2014년에는 스티브 맥퀸 감독이 <노예 12년>이란 동명의 영화를 제작했다. <노예 12년>은 2014년 열린 제7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제8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섭이 자유인의 삶을 누렸던 뉴욕 주 새러토가에서는 매년 7월 셋째 주 토요일을 ‘솔로몬 노섭의 날’로 지정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흑인노예와 노예상인-인류최초의 인종차별> 장 메이에
<그들은 자유를 위해 버스를 타지 않았다> 러셀 프리드먼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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