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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5 11:25 수정 : 2018.01.25 13:52

[역사 속 오늘] 45년 전 오늘,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한성호 침몰

“진도 바다서 대낮 여객선 침몰 , 사망 ·실종 61명 ”

(왼쪽부터) 각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73년 1월 26일 치.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45년 전 오늘, 1973년 1월 25일 오후 2시 30분께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일제히 보도됐다. 앞서 1970년 12월 15일에도 거문도 해상에서 326명의 승객이 희생되는 남영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불과 2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또 한 번의 대형 해상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정원 86명의 목선에 136명의 승객과 소주 125상자·시멘트 22부대 등 화물 6톤을 싣고 목포항을 출발한 한성호는 중간 기항지에서 27명의 승객을 내리고 가치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출항 당일 파도가 심하게 일자 선장은 승객들이 갑판 위로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선실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다. 이 때문에 승객들은 선실에 갇혀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구명대 역시 벽장 속에 넣고 열쇠로 잠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제주에서 부산으로 항해하던 남양상선 소속의 남영호. 1970년 12월 15일 거문도 동쪽 해상에서 침몰해 326명이 희생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성호 침몰사고로 19명이 사망, 42명이 실종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한 실종자 수는 74명에 달했다. 결국 정부는 사고가 발생한 지 일주일여 만인 2월 1일 수색 작업 중단을 결정할 때까지도 정확한 승선자 수를 파악하지 못했다. 선박 과적과 안전 불감증이 얽힌 전형적인 인재였지만,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보인 모습은 3년 전 남영호 침몰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고, 2014년 세월호 침몰 참사 때도 고스란히 반복됐다.

안전 불감증이 불러온 예견된 사고

<동아일보> 1973년 1월 27일 치.
한성호가 출항하기 이틀 전인 1973년 1월 23일부터 남해안 일대에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져 모든 배의 출항이 금지된 상태였다. 한성호 선장은 목포지방해운국장에게 ‘비교적 안전한 구역인 가치리까지만 가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운항 허가를 받아냈다.

하지만 선장은 가치리를 지나 파도가 센 조도를 향해 달렸고, 이내 거센 파도에 배가 기울었다. 배의 요동에 놀라 아래층 객실에서 몰려나온 40여 명의 승객들과 갑판에 나와 있던 승객 10여 명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때도 결국 스스로 빠져나온 이들이 생존자의 전부였다. 나머지 승객들은 밖에서 잠가버린 선실 문 때문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도 탈출하지 못했고, 선체와 함께 15m 바닷속으로 그대로 가라앉았다. 선실 문을 잠근 장본인이었던 선장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채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정부의 구조작업 일지

<경향신문> 1973년 1월 26일 치.
사고 당일 25일

배가 침몰한 지점은 육지와는 불과 20~3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까지 헤엄쳐 온 생존자들의 신고를 받은 진도경찰서는 목포해경대에 연락했다. 경찰 경비정 1척과 해경 경비정 3척 등 5척의 경비정과 공군 헬리콥터가 사고 현장에 출동해 합동구조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스스로 바다로 뛰어든 승객들 외에 추가로 구조된 생존자는 없었다.

<경향신문> 1973년 1월 27일 치.
26일

경찰은 사고 다음 날인 26일에야 잠수부와 목포 축항 사무소 소속 준설선을 사고 현장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파도가 높아 작업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정부는 교통부 선박 담당관을 현지에 파견해 사후 수습을 맡겼다. 그러나 담당관은 승선자 수와 사망·실종자 수, 사고 원인 등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만 보였다.

사고가 나자 목포 해운국에서는 승객 66명과 승무원 9명 등 75명이 승선했다는 보고를 올렸고, 담당관은 그 이상의 상황은 파악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교통부의 한 관계자는 “내려간 교통부 관계자들의 연락이 없고 경찰에서 선장 등 사고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해가 파악이 늦어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한성호 선장 등 관계자 5명에 대해 선박안전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경찰은 “이들이 선장 대신 자격이 없는 갑판원에게 키를 맡겨 향해 구역을 위반했으며, 승객 명단을 허위 작성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목포 해운국 직원 3명도 승객 명부 허위기재에 대해 묵인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구조작업이 더뎌지는 사이 한국해운조합은 한성호 희생자 위로금에 대한 논의를 서둘러 시작했다. 조합은 선령 13년의 노후선인 한성호의 선체 공제금 210만 원과 희생자 1명당 50만 원의 선객 공제금을 유가족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동아일보> 1973년 1월 27일 치.
27일

구조작업반은 사고 사흘째인 27일 “실종자들이 선실 속에 갇힌 채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며 “선체 인양작업을 서두르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미 해안가에는 목선인 한성호의 선체로 추정되는 배 조각과 승객들의 화물이 떠밀려와 가득 쌓인 상황이었다.

28일

경찰 수색대는 가라앉은 선체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다. 해경 함정 4척과 7척의 배, 8명의 잠수부가 동원됐지만 13m나 되는 수심과 강한 물살 때문에 선체 수색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치안국은 사고 나흘째가 돼서야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29일

해군 함정 1척과 잠수부 등이 29일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수색작업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매일경제> 1973년 2월 2일 치.
2월 1일

사고대책 본부는 사건 발생 8일째인 1일 오후 5시를 기해 모든 수색작업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수중 수색작업에도 판자 조각만 발견했을 뿐이므로 선체가 산산조각 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수색은 무의미하다는 게 이유였다. 사고대책 본부는 수색작업 포기 발표와 함께 작업반도 모두 철수시켰다.

한성호에 오른 승객 대부분은 조도에 사는 사람들로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수색작업 철수 발표에 실종자 가족들은 육지와 20~3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고 지점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2월 12일

정부는 한성호 침몰 사고의 책임을 물어 목포지방해운국장을 직위해제하고 여수지방해운국장을 이동 발령하는 것으로 서둘러 사고 수습을 마무리 지었다.

한성호 침몰 사고 수습기간 ‘언론 보도로 보는’ 대통령 박정희의 일지

<경향신문> 1973년 1월 17일 치.
한성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여쯤 뒤인 1973년 2월 2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10월 유신 이후 처음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박정희가 총재로 있던 민주공화당은 불법선거운동으로 인해 한창 논란이 일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언론에는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한성호 침몰과 관련해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매일경제> 1973년 1월 30일 치.
한성호 침몰사고 당일인 25일에는 정부부처 보고 순시와 린든·B·존슨 전 미국 대통령 서거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명, 수석비서관을 미국대사관에 직접 보내 조화를 전달하고 조의를 표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뿐이다. 26일에도 정부부처 보고 순시에서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울러 인도 독립 25주년을 맞아 축전을 보냈다는 보도도 실렸다. 27일에도 역시 정부부처 보고 순시 소식은 빠지지 않았지만, 박정희의 한성호 사고와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

<매일경제> 1973년 2월 2일 치.
한성호 수색 중단 발표가 있던 2월 1일 박정희는 자신이 총재로 있던 민주공화당의 사무총장 등 관계자들을 만났다. 당시 보도를 보면, 박정희는 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이 정치 유신과 공명선거를 기필코 실현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이날 정부 인사도 발표한다.

유신 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 박정희는 “일부 지역에서 지각없는 사람들이 선거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해서 부분적인 오점을 남긴 것은 대단히 통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번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는 전국적으로 볼 때 유신 이념을 구현한다는 뜻에서 깨끗하게 실시되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성호 침몰 사고로 인해 민주공화당의 불법선거운동 의혹은 조용히 잊혔고, 박정희가 장기집권의 장치로 도입한 중선거구제에 따라 민주공화당은 1당이 됐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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