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3.20 11:13 수정 : 2018.03.20 11:59

고종의 모습 (왼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고종이 사용한 전화기와 같은 모델의 L.M에릭손이 생산한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 사진 출처 <폰박물관>.

[역사 속 오늘] 116년 전 오늘인 1902년 3월 20일
서울-인천 간 한국 최초의 공중전화 개통

고종의 모습 (왼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고종이 사용한 전화기와 같은 모델의 L.M에릭손이 생산한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 사진 출처 <폰박물관>.
116년 전 오늘인 1902년 3월 20일, 서울과 인천 사이를 잇는 전화가 개통됐다. 기존의 관용 전화와 달리 일반 국민들도 사용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공중전화였다.

당시 전화기는 ‘덕률풍’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화기의 영어식 이름인 ‘텔레폰’과 비슷한 한자음을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덕률풍’ 이외에도 비슷한 발음인 ‘다리풍’, 혹은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뜻의 ‘전어기’, ‘어화통’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표기법이 통일되지 못한 이유는 전화가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것인 만큼 그 나라의 표기법에 차용해서 불렀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화 사용은 을미사변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여러 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했다. 그 역사를 하나씩 짚어봤다.

19세기 당시의 전화기.
최초의 전화, 김구의 사형을 면하게 하다

한국에 최초로 전화가 들어온 것은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 ‘상운’에 의해서다. 이후 1884년 정식으로 도입된 전화는 임오군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 당시 불안정한 시국으로 인해 전화 사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189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덕수궁 내부에 전화기가 설치됐다.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궁에서 직접 인천으로 통화를 했다. 한국 최초로 이뤄진 이 전화 통화로 인천 감옥에 수감 중이던 김창수라는 인물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김창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집행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고종은 여러 날이 걸리는 어명 전달 방식이 아닌 직접 ‘전화’를 걸어 사형 집행 정지 명령을 내리는 파격적인 방법을 택했다.

고종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김창수는 이후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고종이 건 한국 최초의 전화로 사형을 면했던 인물이 바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이다. 백범은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 받았던 사실을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세 번 절하고 받던 임금의 전화

1886년 궁내부 교환기를 통해 고종과 대신의 전화통화 모습을 재현한 상상도. <한국통신박물관>소장.
한국 첫 통신의 역사는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궁에서 시작했다. 당시 전화는 임금의 침소 등 궁궐 내부에 3대, 정부의 각 부처에 7대, 평양과 인천에 2대 등 모두 12대였다. <승정원일기> 139책(고종 35년, 1898년 12월 13일)을 보면 “‘전어기’가 있어 시시각각 소식을 신속하게 전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외무아문일기> 권12(고종 35년, 1월 28일)에는 “동일 하오 5시에 궁중에서 외무 협판이 대동하도록 전화로 외무부에 시달하였다는 사실과 인천 감리가 전화로 하오 3시에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외아문에 보고한 사실...”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궁궐 내부와 정부 부처 사이에 본격 전화 행정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금과 정부 부처 사이의 행정이 전화로 이뤄진 만큼 신하에게 전화는 곧 임금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임금이 전화를 하면 신하들은 벗어둔 관복, 관모, 관대로 정장을 하고 큰절을 세 번 올린 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려 받았다고 한다. 전화 한 통을 받는데도 별도의 복잡한 예절이 필요했던 셈이다.

영화 관객 중 OOO 씨, 전화받으세요!

한성(서울)~인천 간 전화업무를 담당했던 한성전화소의 1902년 당시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궁에 전화가 설치된 지 6년이 지난 1902년 3월 20일, 기존의 관용 전화와 달리 드디어 일반 국민들도 사용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공중전화가 개설됐다. 교환시설을 갖춘 관소인 전화소는 1902년 한성(서울)전화소와 인천전화소에서 시작해 개성전화소의 개설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평양과 수원, 한성전화소 산하인 서울 경교, 도동, 마포, 시흥 등 9개소로 늘었다. 전화소 개설이 증가함에 따라 개인전화 가입자 수도 80여 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하지만 1905년 4월 ‘한일 통신협정’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통신 사업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만다. 이로 인해 민간 전화사용의 80% 이상은 일본인이 됐다. 게다가 나머지 전화는 정부 부처와 신문사, 극장 등에서 관용으로 사용됐으므로 조선인들의 전화 사용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잡지 <별건곤>(1927년 3월 1일치 발행)의 ‘극장만담’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보면, ‘극장에 온 손님에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여기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스크린 옆 기둥에 유리등을 끼워놓고 그 유리에 (전화 온) 사람의 이름을 써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으로...’라고 썼다. 이 기록은 민간 전화사용의 제한으로 인해 관용전화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의 웃지 못 할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일본에 빼앗긴 통신 사업권은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무려 40년간 되찾을 수 없었다.

수동식 ‘흑통’과 자동식 ‘백통’

전화 자동교환기 도입 이전의 유선전화는 교환수가 있어 가입자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또 가입자가 번호로 기호화하기 전에는 이름과 주소로 구별되어 교환수는 가입자와 인격적인 관계였다. 사진은 옛 서울중앙전화국 시외전화교환실. <한겨레> 자료 사진.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통신시설은 크게 훼손됐다. 1960년대 들어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세우면서 통신사업도 단계적으로 개발됐다.

1970년까지만 해도 전화기를 들면 회선에 전류가 흘러서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를 점등시키면 교환원을 호출하는 방식으로 통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1년에 이르러서는 교환원 중개 없이 가입자가 직접 다이얼을 돌려 전화를 걸 수 있는 장거리 자동전화가 처음 개통됐다. 사용하는 전화기에 따라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인 ‘흑통’과 교환원 없이 자동식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백통’으로 나뉘었다. 특히 부유층이 사용한 ‘백통’은 당시 집 한 채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 물건이었다.

‘1가구 1전화’에서 ‘1인 1전화’로

전국 전화 자동화 완성 기념식.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한국의 전화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 1982년 이후 전화 개통이 매년 100만 이상씩 늘었다. 1987년에는 1000만 회선을 개통해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다. 1993년에는 2000만 회선을 돌파하면서 ‘1인 1전화’의 개인 통신 시대로 접어들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시작된 휴대전화 서비스와 함께 1990년대 초반 ‘삐삐’는 무선 이동통신의 대중화도 열었다. 2000년대 후반 인터넷 서비스와 전화를 결합한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유선전화는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반면, 2015년 말을 기준으로 국내 무선이동통신 가입자는 5900만 명에 이른다. KT는 2002년 정보통신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주력 서비스업종인 ‘유선전화 퇴출’”을 공식화한 바 있다. 한국에 첫 민간용 전화가 개통한 지 꼭 100년 만의 일이다.

참고문헌

<한국전기통신 100년사 >, 체신부

<기록으로 본 한국의 정보통신 역사 >, 진한 M&B

<디지털시대의 정보이야기 >, 홍릉과학출판사

<별건곤 > 제 5호

국가기록원 공식 누리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역사 속 오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