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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근씨 귀순 당시 모습. <대한뉴스> 보도 영상 갈무리(왼쪽). <경향신문> 1967년 3월23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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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51년 전 오늘, 1967년 3월22일
국영통신사 부사장 출신 이수근 판문점서 귀순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서 체제 선전에 활용
감시·통제 당하는 현실에 제3국으로 탈출 시도
베트남에서 잡혀 온 뒤 위장간첩으로 몰려 사형
2006년 과거사위 “조작된 인권유린 사건 평가”
법원, 재심에서 “위장간첩 아니다” 무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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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근씨 귀순 당시 모습. <대한뉴스> 보도 영상 갈무리(왼쪽). <경향신문> 1967년 3월23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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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전 오늘인 1967년 3월 22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인 이수근씨가 판문점에서 남쪽으로 탈출해 귀순했다. 20년 동안 기자로 일하며 김일성 수행기자를 거쳐 국영통신사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북한 내 거물급 인사의 귀순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씨를 적극 환영했다. 하지만 그는 귀순한 지 2년여가 지난 1969년 7월 2일 돌연 ‘위장 간첩’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그로부터 39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2008년 12월 29일, 대법원은 당시 이 씨에게 씌워진 위장 간첩 혐의는 조작되었다며 이 씨에게 뒤늦은 무죄를 선고했다.
이 씨는 어쩌다 위장 간첩으로 몰렸을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이수근 위장 간첩 사건’에 대한 중앙정보부 등 관련자들의 증언과 관련 기록을 조사해 공식 발표한 보고서와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톺아봤다.
남한으로의 극적 탈출과 한국 정부의 환영
김일성 수행기자 출신의 고위급 인사인 이수근 씨의 귀순은 북한과 사상, 경제 등 모든 측면에서 대립과 경쟁의 관계에 있었던 박정희 정권에게 체제 우위를 나타낼 호재로 다가왔다. 이 씨가 언론인 출신인 만큼 최근의 북한 사정을 잘 알 것도 분명했다. 이에 이 씨를 중앙정보부 1급 판단관으로 채용했고, 남한 정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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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967년 3월 23일 치(왼쪽). <매일경제>1967년 4월 18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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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야도 각각 환영 담화를 발표하며 이 씨의 귀순을 반겼다. 한국 정부는 그의 귀순과 관련해 판문점 유엔 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소장에는 2등 근무공로훈장 수여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이 씨도 언론과의 인터뷰와 대국민 반공 강연 등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아울러 한국의 대학 교수와도 결혼해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에 망명 선택
박정희 정권과 이수근 씨 사이의 좋았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 씨를 예의 주시하며 그의 일상적 생활과 대외 활동을 모두 통제하고 감시했다. 이 씨는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에 남한으로의 귀순에 환멸을 느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씨는 중립국으로의 망명을 택하고 한국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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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는 이수근 씨.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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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북에 있던 아내의 조카인 배경옥 씨와 함께 여권을 위조해 출국했다. 이들은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향하던 중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돼 한국 군용기 편으로 압송됐다.
중앙정보부의 ‘위장 간첩’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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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9년 2월 13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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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는 “이수근이 북한 내에서의 숙청 위기 속에서 지령을 받고 위장해 귀순했으며, 북한 김일성에게 암호문 등을 보내려했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의 발표 뒤 당시 언론은 연일 그를 두고 ‘음흉한 수법의 북괴 스파이’, ‘간첩 사명 띠고 위장 귀순’ 등의 제목을 달고 위장 간첩으로 단정하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수근을 사형하라’며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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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9년 3월 22일, 5월 10일, 7월 3일 치(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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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근 씨는 귀순한 지 2년여가 지난 1969년 5월 10일 결국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는 선고 직후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겠다고 밝혔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끝내 항소하지 못한 채 형 확정 2개월 만인 그해 7월 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절차적 위법성과 고문·가혹 행위에 의한 자백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전략 신문 결과 위장 귀순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이수근을 판단관으로 채용하여 국민 승공 계몽사업에 활용하였으나 , 이수근이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재북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한국을 출국하자 , 중앙정보부가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조작 , 처형하여 귀순자의 생명권이 박탈된 비인도적 , 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평가된다.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2006년 12월 ‘이수근 위장 간첩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 등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과 관련 기록을 검토한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과거사위의 발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조선일보> 조갑제 기자와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등 언론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해 온 해당 사건의 조작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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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는 이수근 씨.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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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위는 보고서에서 “중앙정보부가 1969년 1월 31일 이수근 씨를 사이공에서 체포한 후 압송, 영장 없이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수사한 지 11일 만인 2월 11일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형법상 불법감금죄가 인정되었으므로 형사소송법 제422조 규정에 의해 재심사유에 해당된다”고 덧붙였다.
과거사위는 이수근 씨의 자백에 대한 문제점도 분명히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수근 씨를 간첩으로 인정한 수사 및 판결은 이 씨의 일부 자백에 의존하고 있으나, 그의 자백은 가족들의 면회가 금지되고 변호인 조력 등 방어권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마저도 “구타나 강요 등으로 인하여 자백하였을 개연성이 있어 (그의 자백은) 임의성 내지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수근 씨가 간첩이 아닌 이유 3가지
이수근 씨가 중앙정보부의 주장처럼 위장 간첩 활동을 위해 북한에 가려고 했다면, 첫 기착지인 홍콩에서 중국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씨는 굳이 제3국인 캄보디아로 향하고 있었다.
이 씨는 체포 당시 영한사전·한영사전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중립국에 망명하여 남북한 체제 모두를 비판하면서 한반도 통일과 관련된 책을 쓰며 살려고 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아울러 이 씨에게는 간첩에게 필수적인 암호명, 난수표 등도 없었다. 또 북한으로 보내려고 모스크바 교회로 발송했다는 비밀 편지는 암호화된 것도 아니었고, 국가기밀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 씨가 감찰실 직원들과 심지어 운전기사에게까지 동향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외부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으로 볼 때, 그의 국가기밀 탐지행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과거사위는 이 같은 내용과 함께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이수근 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사법권에 의한 살인과 무죄 판결
국가는 수사 과정에서의 불법감금 , 자백에 의존한 무리한 기소 및 증거재판주의 위반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들과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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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8년 12월 28일 치(왼쪽). ‘이수근 간첩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받은 이 씨의 처조카 배경옥 씨가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선고를 받은 뒤 당시 한 일간지 1면에 크게 게재된 사진을 보며 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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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위의 권고가 내려진 지 2년이 지난 2008년 12월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또 이 씨와 남한 탈출을 함께한 처조카 배경옥 씨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배 씨는 ‘이수근 위장 간첩 사건’에 연루돼 21년 동안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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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서울구치소 공동묘지 이수근 묘.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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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37년 만에야 이수근 씨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간첩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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