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58년 전인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서 눈에 최루탄 박힌 김주열 열사 주검 떠올라
|
<부산일보> 1960년 4월 12일 치(왼쪽), 김주열(당시 16살, 마산상고 수험생)군이 실종 27일만인 1960년 4월 11일 마산시 중앙동 대한통운 옆 미창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를 때의 장면. (당시 언론사들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은 원본 사진을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
삼·일오 사건 실종 학생 김주열 군은 참살 당하였다
-잔인 극악하게 학살 11일 11시 중앙부두 앞바다서 발견
오늘로부터 58년 전인 1960년 4월 11일 경상남도 마산시(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이 발견됐다. 김 군은 오른쪽 눈부터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힌 채 주검으로 떠올랐다. 실종된 지 한 달여 만에 발견된 탓에 시신의 부패 또한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김주열 군은 마산에서 시작된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경찰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 군의 주검을 바다에 버렸다. 김주열 군의 주검은 이승만의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로 인해 ‘좌익 폭도’로 내몰린 시민들의 분노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득표율 115%…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
|
<동아일보> 1960년 3월 17일 치.
|
당시 이승만 정권은 12년 동안 지속된 장기집권 체제의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꾸몄다. 선거는 ‘투표함 바꿔치기’, ‘5인 1조 투표’ 등 갖가지 불법적인 수법들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이 속한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부통령인 자유당 이기붕의 득표율이 115%가 나오자 적당히 낮춰 발표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 <한겨레> 자료 사진.
|
당시 외신들은 한국의 부정 선거에 대해 ‘독재국가 징조’, ‘조작된 선거 승리’, ‘정치적 자유, 놀랄 만큼 후퇴’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냈고, 이승만의 재선에 대해 “썩은 승리”라고 평가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1960년 3월15일 선거 당일부터 전국적으로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
1960년 3·15 의거 직후 부산 <문화방송>(MBC) 전응덕 보도과장이 김주열군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
전북 남원 출신이었던 김주열 군은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1960년 3월 14일 마산으로 들어갔다. 김주열 군은 3월 15일 마산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 군의 어머니인 권찬주 씨는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마산 시내 곳곳을 수소문했다. 아울러 방송과 신문 등 가리지 않고 아들의 실종을 알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마산 시민들에게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돼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김주열 미스터리’가 뇌리에 박히다시피 했다.
그러는 사이 이승만은 부정 선거로 인한 시민들의 규탄 시위를 오히려 폭동으로 몰아갔다. 명분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파 후손들이 자주 애용하는 ‘좌파 폭도’론이었다. 무력진압에 나선 이승만 정권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마산사건 대책위는 반공청년단과 정치 깡패들에게 카빈총 30정이 지급됐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거리에서 즉사하는 시민들이 발생하는 등 유혈사태의 충격이 심각해지자 규탄 시위는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주검
|
<동아일보> 1960년 4월 14일 치.
|
김주열 군이 실종된 지 한 달여가 지난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무렵, 한 낚시꾼에 의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 한 구가 마산 앞바다에서 인양됐다. ‘그 주검은 바로 김주열’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마산 시민들에게 퍼져나갔다. 당시 <부산일보>는 처참한 김주열 군의 주검 사진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또 모든 언론사에 이 사진을 제공했다. 김 군의 처참한 모습에 전 국민이 분노했다.
김 군의 주검이 떠오른 4월 11일, 잠시 주춤했던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다시 타올랐다.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마산 제2차 봉기를 시작으로 4월 19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주한 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를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약 1000명의 청소년들이 모여 서울로 이송하기 위해 김 군의 시신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시가지를 행진하여 지역 경찰서로 이동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군중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시위 분위기를 전했다. 아울러 “군중들은 ‘이기붕에게 죽음을’과 ‘이승만 정권과 함께 물러나라’고 소리쳤다”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경찰이 200-500발의 총을 쏘아 군중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적어 이승만 정권의 무력진압이 총기를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일어났음을 문서로 증언하기도 했다.
|
<동아일보> 1960년 4월 13일 치.
|
한편, 김주열 군의 주검은 병원에 안치된 채 수습되지 못하고 있었다. 검찰은 김 군의 얼굴에 박힌 최루탄이 포탄인지 불발탄인지 몰라 폭발 우려로 부검을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군의 어머니는 “주검을 인수할 수 없다”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사람이 처리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군의 부검은 주검이 발견된 지 사흘 만인 4월 15일에 이뤄졌다. 부검에 참여한 의사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김 군 얼굴에 박힌 최루탄이 발사에 의해 박힌 것인지, 또는 사람 손에 의해 박은 것인지 아는 바 없다”고 말해 갖가지 의문점을 남기기도 했다.
|
<마산일보> 4월 20일 치.
|
김 군의 부검 결과 발표로 인해 민심이 더욱 요동쳤다. 18일에는 김주열 군의 주검을 유기했다는 마산경찰서 경비 주임 박종표의 자백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중년 여성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까지 확대됐다.
군중들이 외치는 “이승만 정부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두고 이승만은 ‘불온 구호’라며 검찰과 경찰에 각각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면서 경찰에서 수사하는 목적이 구호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며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만들어 시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갔다.
피의 화요일이 된 4월 19일
김 군의 주검이 발견된 지 일주일이 지난 4월 18일, 시위의 물결은 서울까지 올라온다. 고려대학교 전교생이 시위에 나서며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대학생들의 참여도 이끌어낸다.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4월 19일 정점을 치닫게 된다.
|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 치.
|
이승만은 장갑차를 동원해 군중에 무차별 일제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사망했으며, 총상자 또한 수백 명에 달했다. 4월 19일 하루 서울에서만 104명이 사망했다. 부산에서도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 부상 70명이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 군도 포함됐다. 전 군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당황한 이승만은 19일 당일 오후 3시께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달리 중립을 지켰다.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킨 것이다. 당시 서울지역에 출동한 계엄군인 15사단은 각급 부대에 긴급 지시사항을 내렸다.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
이승만의 등 떠밀린 하야, 번복, 하야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 할 일이다 .”
-1960년 4월 20일 이승만 대국민 담화 -
|
<한겨레> 자료 사진.
|
전국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의 뜻이 없었다. 오히려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민들을 비난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면서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엄군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 국무부 장관은 주미 한국 대사에게 항의 각서를 보낸다. 계속해서 한국 내 상황을 보고받았던 미국은 앞서 1,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에서 그친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 국무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기자회견 이튿날인 4월 21일 국무 위원은 일괄 사표를 낸다. 부통령이었던 이기붕 또한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IMAGE11%%] 더 이상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건 당시 김정렬 국방부장관이었다. 김 장관은 4월 26일 오전 이승만에게 하야할 것을 권유했다. 국무위원과 비서관들도 하야를 재촉했다. 당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이승만에게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라는 뜻이었다. 이승만은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IMAGE12%%] 하지만 이승만은 이튿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갑자기 사임을 거부했다. “내가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한 국무위원이 ‘사임해야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직언한 끝에 이승만의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됐다. 이로써 부정선거의 주인공이었던 이승만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도주한다. 3·15 부정 선거는 한국 헌정사 이래 국회 의결을 통해 정식으로 무효 처리된 유일한 선거로 남았고, 4·19 혁명은 독재에 항거한 국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린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IMAGE13%%]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는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에 안장됐다. 아울러 서울 4·19 민주묘지와 마산 3·15 민주묘지에 각각 가묘가 조성돼 그를 기리고 있다. 김 열사는 주검으로 떠오른 지 35년 만인 1995년 4월 11일, 모교인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50년 만인 2011년 4월 11일, 정부 지원 없이 후원금과 성금만으로 치러졌다.
참고 문헌
미국외교기밀문서 (FRUS) 1958-1960. Volume XVIII. Japan; Korea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의 세부사항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보고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의 시신 > 박태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경신문 > 1960년 3월 16일 자 , <워싱턴 포스트 > 1960년 3월 17일 자
<마산일보 > 1960년 4월 12일 자 , 4월 20일 자
<한겨레 > 2000년 4월 5일 자 , 역사문제연구소 이신철 칼럼
<한겨레 > 2014년 1월 13일 자 , ‘길을 찾아서 이룰태림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