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5월 1일
캄보디아에 살던 ‘훈 할머니’ 이남이 씨 영구 귀국 선택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끌려간 지 55년 만에 고향 돌아와
하지만 넉 달 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캄보디아로
‘훈 ’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할머니가 캄보디아 프놈펜 북쪽의 조그만 마을에서 살고 있다 . 한국 이름은 오니 , 경남 진동이 고향이라고 말했다 .
-<프놈펜 포스트> 1997년 6월 13일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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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할머니’ 이남이 씨.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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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5월 1일, 캄보디아에 살던 ‘훈 할머니’ 이남이 씨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간 지 55년 만에 한국 국적을 되찾고 마침내 돌아온 고향 땅이었다.
하지만 이 땅은 이미 훈 할머니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반세기를 캄보디아인으로 살아온 훈 할머니는 어느새 고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훈 할머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넉 달여의 짧은 고국 생활을 뒤로한 채 캄보디아로 되돌아갔다. 훈 할머니는 그로부터 2년 5개월 뒤 캄보디아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인 이남이에서 일본인 하나코로, 하나코에서 다시 캄보디아 훈 할머니로 살다간 한 많은 인생이었다. 훈 할머니는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던 삶에 대해 끝내 아무런 사과와 보상도 받지 못했다. 훈 할머니가 겪은 비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다.
할머니 사연
훈 할머니의 어릴 적 이름은 이남이였다.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서 태어난 이남이는 부모, 덕이 언니와 남동생 태숙, 막내 순이와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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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의 실제 모습. <미국립문서보관소>,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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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던 열여섯 이남이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갔다. 부산항에서 군인, 민간인 등 수백 명과 함께 배에 태워졌는데, 내리고 보니 일본이 1942년 점령한 싱가포르였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은 이남이를 ‘하나코’로 불렀다. 이남이는 그를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이남이는 수많은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다시 한 달 뒤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끌려간 이남이는 위안소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었다. 이남이는 그곳에서 일본군 장교의 현지처가 돼 그의 딸을 낳기도 했다. 이후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이남이는 캄보디아에 홀로 남겨졌다. 일본군 장교 사이에서 낳은 딸은 1994년 사망했다.
이남이는 살기 위해 자신이 위안부였던 사실과 신분을 숨긴 채 캄보디아 남자와 재혼했다. 캄보디아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1남 2녀를 두었다. 하지만 술주정뱅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3남매와 남겨진 이남이는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잔인한 역사는 캄보디아에서도 이어졌다. 이남이의 아들은 캄보디아의 급진좌파 무장단체인 크메르루주에 납치돼 영원히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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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할머니’ 이남이 씨.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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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이에서 하나코로, 하나코에서 다시 캄보디아인 훈 할머니로 고된 삶을 이어갔다. 그렇게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아온 세월만 반세기가 넘었다. 그러는 사이 이남이는 부모님의 이름은 물론 한국말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이남이는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이 ‘오니’라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또 고향이 ‘진동’이라는 것과 자신이 4남매 집안의 차녀였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회상했다. 다만 “집을 떠나오던 날 울며 따라 나오던 어머니가 실신했다”고 말해 자신이 강제징용 되던 날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사는 한국인 ‘훈 할머니’
훈 할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던 한 한국인 사업가였다. 1996년 우연히 한국인 사업가를 만난 훈 할머니의 손녀가 그에게 할머니의 사연을 전한 것이다. 이후 50여 년 만에 한국인을 만나게 된 훈 할머니는 “바닷가인 고향에서 김치를 담근 기억이 나고, 아리랑 구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며 “고향에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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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7년 6월 16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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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할머니의 사연은 이듬해인 1997년 6월 13일 캄보디아 신문 <프놈펜 포스트>(The Phnom Penh Post)에서 처음 보도했다. 신문은 73살 한국인 훈 할머니가 캄보디아 오지에 생존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훈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위안부로 끌려온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했다. 이후 <에이에프피 통신>(AFP)을 통해 전 세계로 보도되면서 국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국민의 뜨거운 관심이 이어졌다. 훈 할머니는 위안부 후원단체들과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55년 만에 밟은 고국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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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4일 오전 55년 만에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전 일본군 위안부 훈 할머니가 감정이 고조되면서 쓰러져 흐느끼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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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4일, 마침내 훈 할머니가 고국을 찾았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지 55년 만의 귀국이었다. 훈 할머니는 고국 땅을 밟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한 서린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가방 안에서 도화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도화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 주세요”라는 한글이 적혀 있었다. ‘오니’라고 생각했던 이름도 귀국을 앞두고 ‘나미’라는 이름으로, 기억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훈 할머니는 “나를 불쌍히 여겨 가족을 찾아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할머니는 몸이 기억하고 있던 노래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휠체어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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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 정신대 제277차 수요집회'에 훈 할머니가 참석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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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으로 돌아온 훈 할머니는 전국을 돌며 가족을 찾으려 애썼다. ‘위안부’ 피해자 수요 집회 등 각종 행사와 8·15 특집 위안부 돕기 모금 생방송 등 방송에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할머니의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연락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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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할머니’ 이남이 씨 관련 당시 <한겨레>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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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할머니는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넘도록 가족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몇몇 언론들은 훈 할머니가 “조선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급기야 거짓말쟁이로 몰기도 했다. 훈 할머니는 가족 찾기를 포기하고 캄보디아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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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매일> 1997년 8월 26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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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경남매일>은 1997년 8월 26일 치 신문에서 훈 할머니의 혈육을 찾았다고 단독 보도했다. 73일 동안의 끈질긴 취재가 낳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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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할머니가 인천 길병원에서 대검찰청의 유전자 감식 결과 친동생으로 밝혀진 이순이 씨를 만나고 있다. 인천/변재성 기자 (왼쪽),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하목마을 선영을 찾은 훈 할머니가 부친의 묘 앞에 엎드린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합천/이용선 기자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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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훈 할머니는 친여동생인 이순이 씨와 올케 조선애 씨 등 한국의 가족들을 극적으로 만났다. 대검찰청의 유전자 감식 결과 이들이 가족이라는 사실도 최종 확인됐다. 이후 훈 할머니는 이남이라는 본명과 한국 국적도 되찾을 수 있었다.
영구 귀국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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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할머니' 이남이 씨가 경북 경산시 동부동 계양유치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국적회복 뒤 첫 투표를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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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시민권을 포기한 훈 할머니는 이듬해인 1998년 5월 1일 한국 국민으로 영구 귀국하기로 했다. 캄보디아의 손녀와 함께 귀국하고 한국인 ‘이남이’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시민모금으로 마련한 성금으로 경북 경산의 한 마을에 보금자리도 꾸렸다. 이곳에서 한국의 조카 가족, 캄보디아에서 함께 온 손녀와 살기로 했다. 한국 국적을 찾은 이남이 할머니는 생전 처음으로 투표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고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IMAGE11%%]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남이 할머니는 결국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캄보디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 넉 달 만의 결정이었다. 이남이 할머니는 그동안 말이 통하지 않아 외로운 나날을 보내온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남이 할머니는 “캄보디아에 남아 있는 20여명의 가족들이 그리워 출국한다”며 “날씨가 따뜻해지는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영구 귀국을 위해 선택했던, 캄보디아에서 낳은 딸과 손녀들과의 생이별은 이남이 할머니가 감내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캄보디아 귀국
[%%IMAGE12%%]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로 되돌아가 둘째 딸 집에 머물던 이남이 할머니는 2001년 2월 15일 캄보디아에서 노령과 병환으로 숨을 거뒀다. 현지에 파견된 한국대사관 직원은 “이남이 할머니는 숨지기 직전까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계속해서 했다고 캄보디아 가족들이 말했다”고 밝혔다. 대사관 직원은 또 “이남이 할머니가 한국말을 제대로 못해 한국에 살지는 못했으나 한국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대단했다”는 가족들의 말을 전했다.
잔인한 역사 앞에서 이남이 할머니는 자신의 뿌리와 고국의 기억도 잊은 채 살아야 했다. 16년을 살았던 고국보다도 50년을 넘게 살아온 이국 땅에서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훈 할머니’를 탓할 수 없는 이유다.
참고문헌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프놈펜 포스트 > 1997년 6월 13일 자
<경남매일 > 1997년 8월 26일 자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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