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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친선대사로 방북한 탤런트 김혜자씨가 평안남도의 평성육아원을 방문해 국수공장에서 생산한 국수를 먹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모습. 사진 월드비전 제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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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5월30일
배우 김혜자씨, 북한 방문 무산됐다가 2달 반만에 결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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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친선대사로 방북한 탤런트 김혜자씨가 평안남도의 평성육아원을 방문해 국수공장에서 생산한 국수를 먹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모습. 사진 월드비전 제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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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김혜자씨가 오늘 북한에 들어갑니다.”
오늘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5월30일, 유명 배우 김혜자씨가 북한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일제히 보도됐다. 하지만 다음 날인 6월1일. 김씨의 방북 무산 소식이 들려왔다. 김씨 쪽은 “북 쪽의 실무적인 착오 때문에 비자 발급이 미뤄져 서울에 돌아왔다”며 “일정이 재조정되면 조만간 다시 베이징에 가서 북한 방문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달 반이 지난 8월18일, 김씨는 3박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김혜자씨는 왜 북한 땅을 밟으려 애썼을까?
3박4일 북한 일정
애초 김혜자씨는 구호단체인 한국 선명회(현 월드비전)의 후원자 대표 자격으로 북한 6개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는 국수 공장을 둘러보고, 식량지원 문제 등을 협의할 예정이었다. 김씨는 이미 1991년부터 한국 선명회를 후원하면서 소말리아와 캄보디아 등 11개국을 방문해 기아 난민 구호활동에 앞장서 왔다.
북한에 도착한 김씨는 평안남도 평성 육아원을 방문해 아이들을 돌봤다. 아울러 선명회가 지원하는 평북 선천, 평남 안주 개천 평원의 국수공장을 방문해 가동 현황을 살폈다.
선명회는 1994년 11월 한우 60마리와 밀가루· 병원 침대 500개를 지원하는 것으로 북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1995년에는 수수 5백
톤을 북한 함경북도 남양으로 보냈는데, 이는 북한 지원 사업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98년 5월에는 김혜자씨의 방북 무산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약속해 놓은 국수 공장 건설 지원 사업을 분단 반세기 만에 추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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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친선홍보대사였던 김혜자씨 일행이 북한의 국수공장을 방문해 가동 현황을 살펴보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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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씨가 북한을 방문한 목적도 북한 주민들의 식량권 및 건강권 등에 대한 선명회의 인도적 지원을 돕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북한에 다녀온 뒤 2004년 전 세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기록을 담은 에세이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출간했다. 그는 같은해 4월 기차역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해 150여명이 숨지고 가옥 1850여채가 붕괴되는 피해를 입은 북한 용천 긴급 구호와 저소득 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세우는데 인세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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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8년 3월 19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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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념 대립 속에서 어렵게 이어지던 남한 민간단체의 북한 지원이 활성화하게 된 건 1998년부터였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취임과 동시에 민간단체의 북한 지원을 허용했다. 이에 ‘북한 동포 돕기’ 이름의 행사로 언론사와 기업이 협찬과 후원을 하는 것을 승인했다. 병원과 식료품 공장 등 남북협력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은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특히 당시 북한 아동의 영양실태는 열악했다. 북한은 아동의 영양 증진을 위해 어린이 보육 교양법, 인민 보건법, 아동 권리 보장법 등 법령을 정비했다. 그럼에도 북한 아동의 성장장애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2012년 9월 유엔아동기금과 북한 중앙통계국이 실시한 북한 어린이(0~59개월)의 영양실태 조사 보고서를 보면, 5살 미만 북한 아동의 15.2%가 저체중으로 나타났다. 또한 27.9%는 만성 영양장애이고, 이 가운데 7.2%는 매우 심각한 정도였다. 빈혈에 시달리는 아동은 전체의 29%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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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식량난을 겪는 북한의 한 탁아소 어린이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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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어린이의 영양실태는 지역별로도 격차가 컸다. 평양은 만성 영양장애가 19.6%로 나타났는데, 북·중 국경 지역인 양강도는 39.6%, 자강도는 33.3%, 함경남도는 32.9% 등으로 나타났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15 세계 식량 농업 백서’에서 북한 농촌의 체중 미달인 어린이 비율을 26.7%로 추정했다. 이는 북한 농촌에 저체중 어린이가 도시에 견줘 2배 정도 많은 수치라는 점을 나타냈다. 북한 아동의 열악한 성장장애 수치는 주민 소득이 낮은 저개발국가 123개국 가운데서도 24번째로 높은 수준이었다.
국수 공장 후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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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식량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방북했을 때 탁아소에서 식사하고 있던 북한 어린이들. 접시에 담긴 감자가 눈에 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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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씨의 방북에 앞서 1997년 5월 북한을 먼저 방문한 선명회 북한 사업 담당관은 북한의 여러 여건을 고려해 국수공장 후보지를 선정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북한은 지역별로 영양실태 차이가 컸다. 따라서 선명회 쪽은 최소 도마다 한 개씩 국수공장을 짓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하여 평북 선천, 평남 안주, 평남 개천, 강원 원산, 함북 신창 등 5곳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국수공장 후보지 선정을 두고 북한과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쪽 담당자는 교통비 절감을 위해 평양에 5개의 공장을 모두 지어 국수를 생산한 뒤 나누겠다고 주장했다.
선명회는 이미 1996년 12월부터 북한 지역에서 6개 국수공장을 운영하며 6만 명의 주민들에게 하루 한 끼씩 국수를 제공해왔다. 아울러 각 공장을 중심으로 한 지역 발전을 꾀하고, 평양과 멀리 떨어진 지역 사람들도 쉽게 국수를 배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공장 운영을 구상했다. 따라서 선명회 쪽은 북쪽의 의견에 단호하게 맞섰다. 이사회에서 이미 모든 결정이 난 까닭에 임의로 수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결국 북 쪽에서도 선명회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국수공장 설립 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남북 민간단체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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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앞 거리에서 '북한동포 돕기 옥수수 1만톤 보내기 범국민 캠페인'을 벌이자 지나던 시민들이 모금함에 성금을 넣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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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씨의 방북을 계기로 남북 민간단체의 교류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남북 민간교류 단체가 줄지어 설립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한 종교계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등 언론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의 지원이 이어졌다. 이들은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과 질병,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쌀과 의류, 의약품 등의 일시적 지원과 더불어 북한 주민들의 자립을 위한 지속적 지원도 함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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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가 북한의 한 탁아소에서 찍은 어린이들의 모습. 남한 어린이들에 비해 몸집이 작고 영양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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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설립된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BaB(밥·Bread & Balance)이 희망이다’라고 이름 붙여진 캠페인을 통해 북한 아동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 캠페인으로 북한 최북단에 위치한 함경북도 온성군의 105개 유치원과 1개 고아원, 함경북도 회령시의 1개 탁아소와 2개 유치원에서 모두 7451명의 북한 어린이들이 빵과 생필품 등을 지원받고 있다. 아울러 통일문화 사업과 학술사업도 함께 해 평화통일과 남북 교류의 뜻을 확대해가고 있다.
<남북민간교류협의회>는 유기농업 지원을 위한 사료공장 지원 사업과 함께 가축 질병예방을 위한 항생제 대체재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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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당시 현인택 통일부 장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김태영 국방부 장관(왼쪽부터)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청사에서 천안함 관련 기자회견 중 대북제재와 남북교역 전면중단 등을 발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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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러 남북 민간교류 단체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 민간교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동이 심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내려진 5.24 조치로 인해 남북 민간교류는 8년 째 중단되다시피 했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단순히 남북 교류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임에도 결국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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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연리 한 고아원에서 젖먹이 9명이 찬 마룻바닥에 누운 채 배고픔에 겨워 울고 있다. 이 사진은 북한을 방문했던 토니 홀 미국 하원의원이 제공한 것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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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씨는 1998년 북한에 다녀오고 1년 뒤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국수공장과 고아원·유아원 등을 다녀봤는데, 아이들이 배가 툭 튀어나온 게 영양실조의 전형을 보이고 있었어요. 결국 통일이 되면 이 애들이 잘 먹고 잘 자란 남한 아이들과 섞일 텐데 과연 잘 조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데요. 이렇게 크면 통일이 되고 난 뒤에 결국 내 자식들이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참고문헌
북한인권백서 2016
월드비전한국 50년운동사 1950-2000
<한겨레 > 1999년 6월 4일 치
<한겨레 > 2013년 5월 7일 치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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