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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27 10:59 수정 : 2018.08.28 09:11

전두환과 이순자. <한겨레> 자료 사진.

[역사 속 오늘]
38년 전인 1980년 8월27일,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선출
재임기간 내내 무자비한 독재 칼날 휘둘렀지만
40년 지나도록 반성조차 없이 여전히 자기 미화

전두환과 이순자. <한겨레> 자료 사진.
“전직 대통령이 공개된 장소에 나와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되풀이하고 동문서답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일 수는 없다.”

혹시나 했던 기대를 품었지만, 역시나 반전은 없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전두환은 27일 오늘, 자신의 회고록과 관련한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지방법원에 출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을 하루 앞둔 26일, 전두환 쪽에서 돌연 불출석을 통보해왔습니다.

부인 이순자는 전두환의 건강문제 등을 불출석 통보 이유로 들었습니다. 2013년 진단받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인지능력이 저하돼 법정 진술이 어렵다는 겁니다. 아울러 이런 모습을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보일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순자는 이어 광주에서 재판이 열리는 만큼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에이(A)4용지 2장 분량의 불출석 입장문은 국민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일게 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커녕 ‘변명’과 ‘핑계’만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뉘우침 없는 이런 모습은 재임 시절 전두환의 모습마저 떠오르게 했습니다.

1974년 자신의 부대를 찾아온 전두환 1공수특전여단장과 악수하는 노태우 당시 9공수특전여단장. <조선뉴스프레스>제공. <한겨레> 자료 사진
불법으로 대통령 자리를 꿰찬 전두환은 재임기간 내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독재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문제는 전두환의 권력욕 앞에 수많은 국민이 잔인하게 희생되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치욕이자 아픔으로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38년 전 오늘, 전두환 대통령이 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총 투표자 2525명 가운데 2524표를 얻은 전두환 후보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

<동아일보> , <경향신문>, <매일경제> 1980년 8월27일 치.
무효 1표, 99.9%의 압도적인 당선이었습니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38년 전인 1980년 8월27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무기명 투표 결과였는데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 시절 설치된 헌법기관입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설치됐지만, 국민들의 직접 선거를 막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독재 권력의 제도적 수호 아래 또 다른 군부독재 역사의 서막이 열린 셈입니다.

전두환과 이순자. <한겨레> 자료 사진.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 12·12사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오른쪽)이 1979년 10월26일 저녁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전두환은 어떻게 권력의 핵심에 설 수 있었을까요.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기 10개월 전인 1979년 10월26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됩니다. 이른바 10·26 사태입니다.

12.12 군사반란사태의 모의 장소로 알려진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 소속 전차와 장갑차 부대가 새벽 경복궁을 철수해 새로 창설된 제1경비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박정희가 사망하자 당시 신군부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육군 참모총장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이 바로 1979년 12월12일 발생한 12·12사태입니다. 이는 박정희 사망 이후 대통령 자리를 승계한 최규하의 승인 없이 감행한 쿠데타였습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 실세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5월 18일, 광주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권력을 향한 야욕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계엄의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등을 선포합니다. 사실은 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우려한 학생 운동 세력이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18일,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전두환은 광주 일대에 특전사 공수부대를 투입했습니다. 각 대학에는 계엄군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는 학생과 시민을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폭력을 가해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이 잇달았습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시민을 폭행하는 계엄군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광주 전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은 광주시민들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학살로 광주시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결국, 한국의 민주화는 6·10항쟁이 일어난 1987년 6월까지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4층 박종철기념관에 전시된 박종철의 사망진단서. 당시 사망장소와 사인이 모두 미상으로 기록돼 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1987년 1월15일은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를 받다가 쇼크사로 숨졌다고 경찰이 거짓 발표한 날입니다. 박종철은 숨지기 전날인 14일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로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 때문에 숨을 거뒀습니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언론에 박종철 사망 보도가 나가자 단순 쇼크사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과 함께 박종철을 부검한 결과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밝혔습니다.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탁 치니 억 하며 쓰러져 숨졌다’는 내용의 수사결과 발표를 하고 있다. 그는 이듬해 1월 고문 은폐를 주도한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한겨레> 자료 사진.
전두환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지 엿새가 지난 1987년 1월20일에야 처음으로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시합니다. 하지만 이날 전두환의 입장 표명은 국가 원수로서의 책임보다는 사건 윗선에 대한 보여주기 식 문책인사에 그쳤습니다. 정호용 신임 내무부장관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동기로, 1980년 5·18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대통령 최규하에게 광주 상황을 직접 보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광주 진압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3월3일은 박종철의 49재이자, 전두환 취임 6년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전두환은 국민들의 분노는 철저히 외면한 채 취임 6주년 소감을 밝혔는데요. 반면 박종철 49재 및 평화대행진은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저지 병력을 사전 배치해 원천 봉쇄작전에 나섰습니다.

[%%IMAGE11%%] 전두환은 49재 전날인 2일 밤부터 전국에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 최종 집결지 및 행진 예상 코스에 경찰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이날 서울에만 2만2000여명의 경찰력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6만명의 경찰관이 동원됐습니다. 경찰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와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을 향해 사과탄을 던지며 시민들을 강제 해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 대열 속에 있던 신민당 안동선 의원이 최루탄 가스에 질식해 쓰러지고, 김봉욱 의원은 최루탄에 맞아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날 전국적으로 439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28명에 대해 구속 영장이 청구돼 16명은 구속 기소됐습니다.

개헌 유보 선언

[%%IMAGE12%%] 전두환은 1987년 4월13일 특별담화에서 호헌 조처를 발표합니다. 개헌을 하지 않고, 현행 헌법에 따라 다음 대통령 선거인 13대 때도 12대 때와 같은 간선제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울러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도 덧붙였습니다. 사실상 자신이 지목한 후보를 통해 권력을 이어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력으로 권력을 지켜나간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는 철저히 묵살했습니다.

[%%IMAGE13%%] 시민들은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호헌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외쳤습니다. 결국 전두환은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합니다.

반성 없는 40여 년

[%%IMAGE14%%] 전두환은 1988년 2월20일 고별 회견을 통해 자신의 7년 재임 기간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은 이날 ‘1년이라도 더 집권하는 것이 어떠냐’하는 유혹을 뿌리쳤던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인물로 국민 여러분이 기억해줬으면 감사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IMAGE15%%]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전두환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운동, 5공 비리 문제 등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IMAGE16%%] 하지만 사법처리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두환은 1995년 노태우와 함께 반란 수괴죄 및 살인, 뇌물 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뒤 1997년 4월17일 열린 2심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으로 감형,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1997년 12월22일 특별사면으로 구속 2년여 만에 석방됐습니다.

[%%IMAGE17%%] 이후 전두환은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통장에 29만 원 밖에 없다’며 추징금조차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재임 기간 동안 저지른 수많은 과오에 대해서 조금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5·18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로 지칭하면서 민간인 학살·발포 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된 것이 원죄로 광주 사태의 십자가를 지게 됐다’며 자신을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희생에 대한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IMAGE18%%] 오늘로 예정돼 있었던 전두환의 광주지법 출석 혐의 또한 <전두환 회고록> 내용이 문제였습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상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향해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IMAGE19%%] 이에 오월단체와 유가족은 지난해 4월 전두환은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검찰은 지난 5월3일 전씨를 불구속 기소했고, 오늘 이와 관련해 첫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은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닐 겁니다. 반성 없는 40년, 이제 와서 피해자들에 대한 전두환의 사과를 바라는 건 무리일까요?

<한겨레 > 연재 ‘역사 속 오늘 ’의 아래 기사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38년 전 5월 15일 , 끝내 오지 않았던 ‘서울의 봄 ’> 2018년 5월 15일 치

<여성인권 ·민주화 운동 촉발한 부천 경찰서 성 고문 사건 > 2018년 4월 9일 치

<전두환은 끝내 ‘박종철 고문치사 ’를 반성하지 않았다 > 2018년 1월 15일 치

<전두환 대국민 담화 , 29년 만에 드러난 거짓말 6가지 > 2017년 11월 23일 치

참고문헌

<전두환에 관한 비밀 리포트 > 전북민주동우회 자료 제공 , 정동익 ·김대웅

<사료로 보는 20세기 한국사 >김삼웅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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