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⑥ 국가와 자기통제
중앙에서 원형감옥 안 볼 수 있는
벤담의 파놉티콘 장점은 가성비
스스로 자기감시하도록 만들어
‘논어’, 자기통제 중요성 수차례 강조
자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
자신의 못남을 적극 탐색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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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은 가성비 좋은 국가의 통제 시스템이다.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을 적용해 만들어진 쿠바의 감옥 ‘프레시디오 모델로’(The Presidio Modelo). 1928년에 지어졌고 1967년에 폐쇄됐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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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코폴라의 영화 <대부>는 사상 최고의 갱스터 영화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는 갱스터의 현실보다는 갱스터의 꿈을 그렸다.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는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 묵상하고, 고뇌 끝에 충복을 처단하고, 충복은 자크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포즈로 욕조 속에서 피를 흘리며 자결한다. 영화 내내 폭력을 행사하는 갱스터는 불온한 예식을 집전하는 성직자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 속 갱스터는 웅려한 성직자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날 현실의 갱스터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문자를 내게 자랑스레 보여주며 말했다. “전국구 조폭 아무개 이름 들어보셨죠. 그 형님하고 제가 얼마나 친한지 아세요? 이거 지난주에 받은 문자예요.” 국민 대다수가 이름을 들어보았을 법한 갱스터 우두머리가 보낸 문자에는 “방가방가”와 같은 글귀들과 몸서리치게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가득했다.
사회과학자 맨서 올슨(Mancur Olson)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 역시 일종의 갱스터다. 갱스터가 금품을 갈취하고, 지주가 소작료를 걷듯이,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는다. 국가가 꾸는 꿈은 제복을 입은 관리가 세금을 차곡차곡 걷고 치안을 그럴싸하게 유지하는 상태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국가의 꿈이 가장 잘 실현되는 때는 질서가 가장 위협받는 때이다. 전쟁이 일어날 때, 질병이 창궐할 때, 사람들은 평소 이상의 통제를 갈구하고,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원기왕성하게 자원을 징발하고 치안을 강화한다. 그 대표적 예가 전염병이 유행하는 상황이다. 푸코가 전하는바, 뱅센 육군 고문서관 소장 원고에 따르면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국가는 다음과 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외부출입은 금지되며, 그 규칙을 어기면 사형당하고, 유기묘와 유기견들은 모두 살해되고, 집 열쇠는 감독관이 관리하고, 모든 길에는 보초가 있고, 감독관은 매일 순찰하며 모든 사건을 기록한다 등등.
그러나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국가는 자주 실패한다. 대규모 반란군을 진압한 국가는 종종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개폼을 잡지만, 피지배층은 미시적인 저항을 통해 결국 국가를 곤경에 빠뜨린다.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의 연구에 따르면, 피지배층은 지연 전술, 은근한 의무 불이행, 좀도둑질,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공유지 무단점유, 험담, 경멸적 침묵 등 각종 미시적 수단을 통해 국가에 저항한다. 국가가 실패하는 것은 꼭 조직화된 대규모 투쟁이나 영웅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투쟁 속에서, 국가 권력은 잠식된다.
가능하면 싼값에 통제하기
실패가 두려워 그 많은 피지배층을 한명 한명 일일이 통제하려다 보면, 국가도 쉬이 피로해진다. 그리하여 국가는 가능하면 작은 힘을 들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페스트 관련 규정 이후 약 한 세기 반 뒤에, 제러미 벤담은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가랑에게 편지를 쓴다. 국가가 감시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알려주겠다고. 싼값에 원하는 통제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그 방책이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파놉티콘 건축도면에 따르면, 원형 건물 안에 갇힌 수감자들은 중앙 감시탑 안을 볼 수 없는 반면, 중앙 감시탑에서는 원형 감옥 안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 양식으로 말미암아, 수감자들은 누가 감시하는지는 몰라도 늘 자신이 감시받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스스로 조심하고 자신을 통제한다.
푸코가 강조하고 있듯이, 파놉티콘의 장점은 그 가성비에 있다. 파놉티콘은 “감각보다는 상상을 자극하며 그 감시 테두리 안에서 항상 어디든지 존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수백 명의 사람을 맡긴다.” 어쩌면 단 한 사람의 감시자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밖에서는 파놉티콘의 감시탑 안을 볼 수 없으므로, 감시자가 설령 자리에 없다 해도 마치 거기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내므로. 감시자는 “유령처럼 군림한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혹은 그가 인(仁)과 같은 덕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파놉티콘의 원리는 감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벤담은 파놉티콘의 원리가 감옥뿐 아니라 학교나 병영, 더 나아가 소수가 다수를 감독하는 사안에 모두 적용 가능함을 강조한다. 즉 파놉티콘은 국가의 운영 원리이기도 하다. 푸코는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 벤담의 글을 읽어보면, 파놉티콘 구상 속에는 연좌제의 아이디어도 포함되어 있다. 수감자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연대 책임을 지게 된다. “동료의 수만큼 감시자가 있는 셈이 되어 피감시자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결국 전체 안전에 공헌하게 된다.” 즉 파놉티콘은 단순히 국가가 자기 감시를 강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끼리의 감시도 강제한다.
공자의 시대는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역사학자 마크 루이스가 명료하게 정식화한 바 있듯이, ‘중국’의 고대 국가는 주(周)나라의 도시 국가에서 전국시대의 대규모 국가(macrostate), 그러다 마침내 진나라에 의한 제국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진화해 갔다. 그 흐름의 이면에는 귀족들의 대단위 친족 조직이 붕괴되는 현상이 있었고, 친족 조직으로부터 느슨하게 풀려난 이들을 국가는 ‘직접’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후대에 가서 그 쓰임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오가작통(五家作統)이라는 연좌제 혹은 이웃 간의 감시 시스템도 이 무렵에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후대에 편집된 텍스트이기는 하나, <상군서>(商君書)와 같은 텍스트가 이러한 국가주의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자성,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통
<논어>에는 이웃 간의 감시 시스템이나 국가의 물리적 통제력 강화를 옹호하는 부분은 없다. 대신 자기 감시 혹은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명은 여럿 있다. “안으로 반성하며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內省不?, 夫何憂何懼) 이 반성 과정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문장에 나오는 내성이라는 단어를 양나라 황간(皇侃)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일(內省謂反自視己心也)이라고 풀이했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면에서야, 파놉티콘의 세계나 논어의 세계나 다를 바 없다.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은 볼 수 없는 중앙탑 내부 대신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통제한다. 혹시라도 감시당하고 있을까 봐 알아서 긴다. 파놉티콘은 자기 감시의 메커니즘을 외부에서 강제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자기반성이란, 국가가 사람들 일반에 대해 행하는 통제가 아니라, 통치 엘리트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이다. “안으로 반성하며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는 말도 사마우(司馬牛)가 군자(君子)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었다. 또 공자는 못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자성하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見不賢而內自省也) 주희(朱熹)에 따르면, 여기 나오는 자성이란 자신에게도 이러한 못남이 있지 않나 두려워하는 일이다.(內自省者, 恐己亦有是惡.) 즉 자성이란, 세끼 밥을 통해 자신에게 영양을 주는 행위나, 막연히 몽상에 빠져 있는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 즉 자기 파괴적 속성이 있는 행위이다.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는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이라는 면에서 국가가 가하는 고통과는 다르다.
공자는 제국의 신민으로서 자성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후대에 성립된 중국 제국은 자성이라는 아이디어를 활용한다. 신민들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통제를 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명나라 때 사상가이자 반란진압군 수장이었던 왕양명(王陽明)이 그러한 양심의 자기 통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 반란을 진압한 지역에서. 국가 행정력이 불충분하여 적절한 치안을 제공하기 어려운 곳에서 차선책으로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이,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양심’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힘이 충분히 미치지 않는 곳에서마저 사람들이 양심을 발휘하여 스스로 질서를 이루고 살아준다면, 국가 입장에서야 얼마나 좋겠는가. 가성비 좋은 질서 유지는 국가의 오랜 꿈이다.
21세기 한국형 파놉티콘
국가의 그러한 꿈은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 마포구에서도 발견된다. 마포구에 위치한 어느 길목에는 사람들이 종종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곳이 있다. 이에 참다못한 공무원들은 큰 거울을 달아 놓고 거기에 붉은 글씨로 “당신의 양심”이라고 써 놓았다. 왜 양심 혹은 가슴은 늘 붉은색인가. 하여튼, 이곳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러 온 사람은 그 큰 거울을 마주 보게 되며, 그 거울 속에는 쓰레기를 버리려는 자신이 비치게 된다. 당신의 양심이라는 크고 붉은 글씨와 함께. 이것은 21세기 한국형 파놉티콘이 아닐까. 쓰레기를 버리려고 이 자리에 온 사람은 감시자를 보는 대신, 쓰레기를 손에 든 자기 자신을 본다. 할 수 없이 본다. 이 역시 외부 메커니즘을 통해 강제된 자기 통제이며, 그런 점에서 마포구의 쓰레기 투기지역 큰 거울은 자기 감시의 메커니즘을 강제하는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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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한 골목길에 쓰레기 무단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달아놓은 거울. 김영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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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릴 정도의 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정도야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쓰레기를 버리고 그 자리를 표표히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마지막 복수가 기다린다.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고 떠나는 순간, 그 큰 거울의 붉은 글씨 “당신의 양심”은 쓰레기통에 처박힌 그자의 양심을 의미하게 된다.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쓰레기와 함께 자신의 양심도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가 양심을 가슴에 주워 담는 데 실패한 결과, 그의 양심은 마포구 길목에서 쓰레기와 함께 뒹굴게 된다.
군정이 종식되고,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되어 자유의 환상이 미만(彌滿)하던 1990년대 초입. 나중에 영화감독으로 변신하게 되는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노래했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민주주의가 거리에 미만해 보이는 21세기에는 이렇게 노래하자, 양심을 찾고 싶은 날이면 마포구에 가야 한다고. 이제 양심의 추노꾼들은 마포구에 가야 한다. 양심은 마포구에 있다.
김영민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저서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정밀 독해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논어 에세이’ 시즌 1(2017.9.16~2018.3.17)에 이어, 시즌 2에서는 논어에 담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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