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만 기자의 미국 고교, 미국 대학 그리고 미국 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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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만 기자의 미국 고교, 미국 대학 그리고 미국 대입⑨
교육 두고 극단적 갈등없어…교육기득권의 반영이기도
종합면에서 교육기사 찾기 힘든 미국 언론
한국에서 언론은 교육 패싸움 조장하는 역할
한국에서 교육 저널리즘은 일종의 ‘패싸움’이다. 특정계층을 대변한다는 일부 세력들의 패싸움. 가끔씩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목소리가 제시되지만 이런 주의 주장들은 엘리트 교육과 평등 교육 진영의 날선 대립에 묻혀버린다. 언론은 대개 대립을 증폭시키는 구실을 한다.
본고사 논란이나 고교평준화 해제나 자립형사립고 확대 등이 확실한 그 예이다. 교육당국은 이런 집단 패싸움의 중간에서 엉거주춤 눈치보는데 대부분의 정력을 소비한다. 사실 눈치보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양 쪽 진영의 주장을 분석해야 하고 또 직접 모시고 의견도 경청해야 하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잘 골라 그들의 의견도 들어야 하고, 또 청와대나 국회 쪽과도 일정한 선을 대야 하고. 어쨌든 이런 낭비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게 언론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교육 기사 좀처럼 종합면에서 찾아보기 힘들어
그렇다면 미국은 어떨까. 가장 큰 차이는 교육 기사가 좀처럼 1면 등 종합면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 기사들 가운데 우리 신문에 가장 주요하게 등장하는 기사 아이템은 교육과 복지 분야다. 하지만 미국 언론의 종합면에서 의료보험이나 연금 등 복지 관련 기사는 주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교육기사는 찾기 힘들다.
1년 동안 구독했던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경우 그들이 기획 취재한 고교낙방생 탐사기사를 지난 1월 29일 1면으로 올렸다. 5개월 이상 신문을 구독하면서 1면에 주요하게 다뤄진 교육관련 기사는 이 특집물이 처음이었다. 미국의 두번째 대도시인 엘에이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이 신문은 교육섹션을 발행하지 않는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1주일에 1개면을 교육면으로 정해 교육관련 뉴스로 채우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주요 신문이 1주일에 8개면을 교육 기사로 채우는 섹션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기인할까.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아마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의 차이에서 오지 않을까. 사실 한국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구 학생의 70% 이상이 히스패닉이다. 멕시코에서 이민온 히스패닉 학부모 올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머리 쓰는 데 관심이 많다. 멕시코 사람들은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지 모르겠다.” 사고 방식이 다르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대해 히스패닉들은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몸을 쓰는 것과 대비한다.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몸을 쓰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부모처럼 교육에 ‘올인’하지 않아 올가는 초·중학교에 재학중인 자녀가 세명이다. 최소한 방이 3개짜리 집을 얻어야 한다. 교육환경이 좋은 지역의 집을 얻으려면 한달에 2천달러(약 190만원) 이상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학교가 엉망”이라는 로스앤젤레스 통합구에 자녀를 보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산다. 방 3개에 한달 집세 1천달러. 한국인 같으면 아마 방 1개짜리 집에서 기거하더라도 교육 환경이 좋은 곳에 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올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중학교에 다니는 데, 학생들이 떠들고 수업 분위기가 너무 안좋아 걱정이다.” 하지만 그만이다. 모두가 선망하는 지역으로 옮겨갈 돈도 없고, 그렇다고 방 3개 이하의 집에서 살 수도 없다. 자녀 교육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올인’까지 팔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언론 매체들 사이에 교육을 둘러싸고 어떤 명백한 의견 차이를 감지해보지 못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미국 교육에 대한 명확한 동의가 있어서 일까. 아니면 무관심 때문일까. 아마 미국 교육에서 가장 민감하고 의견차이가 나는 부분은 종교일 것이다. 창조론을 교육과정에 공식 포함시켜야할 지, 종교 과목을 필수로 지정해야 할지. 이는 교육의 영역이라기보다 종교 영역에 더 가깝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이기 때문이다. 미국 교육에서 가장 민감하고 의견 갈리는 분야는 종교 영역 물론 교육과 관련된 논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부시 현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도입한 ‘NO CHILD LEFT BEHIND' 정책이나 교사들의 비정년 보장 기간의 연장, 시장이 지역 교육행정 수장이 되어야 하는 지 등의 이슈가 여러 갈래에서 제기된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명백한 계층적 차이에 기반해, 전선을 형성하면서 격렬히 싸움을 전개하는 그런류의 다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교사들의 비정년보장 기간의 연장 문제를 캘리포니아 아놀드 슈워제너거 주지사가 지난해 제기했을 때, 매우 리버럴한 신문인 <엘에이타임스>는 사설로 이를 지지했다. 현재는 2년인데, 신규 교사를 5년 정도 평가한 뒤 정년을 보장해주는 게 합당하다고 이 신문은 사설로 주장했다. 5년 연장안을 반대한 막강한 캘리포니아 지역 교원노조의 의견을 신문은 묵살한 것이다. 교원노조의 힘이 막강하고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교육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이슈가 제기될 경우 대개 사회는 다수가 동의하는 컨센서스를 찾는다. 이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극단적인 갈등 양상을 신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슈워제너거 주지사가 올해 초 교육예산을 올려서 주립대 등록금을 동결시키겠다고 밝혔을 때, 이를 재선을 겨냥한 선심행정이라고 여러 신문들이 비판했지만, 이 정책을 둘러싼 대립적인 갈등 전선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대표적 자유주의 신문, 교원노조와 맞짱 1면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교육 기사들이 아예 실종된 것은 아니다. 이들 신문들이 단골로 다루는 교육관련 기사는 초점이 ‘교육기관이나 교육자들이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에 맞추고 있다. 대학 쪽에서는 제도로서 대학 당국이 법을 제대로 지키고, 교수들은 그에 걸맞은 윤리로 무장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엘에이타임스>가 지난해부터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이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총장 등 행정책임자들이 과도하게 많은 보너스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등록금은 올리면서 이렇게 많은 돈을 대학 최고 관리자들에게 지급하는 게 과연 합당한 지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또 뉴욕과 시카고 등 다른 대도시처럼 엘에이도 시장이 교육행정을 직접 관할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고 있다. 지금은 직선 교육위원이 교육감을 뽑도록 하고 있다. 입시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자, 교육기관 제 역할 하고 있느냐에 집중 사실 기자가 보기에 미국 교육엔 우리 못지 않게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교육 문제가 이 사회에서 큰 쟁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교육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독점 체제의 견고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립 초·중학교는 병들어가고 있지만 일회성으로 한번 짚고 나면 그 뿐이다. 언론들이 우리처럼 집요하게 문제 제기를 한다면 지금처럼 방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백인 중심의 상류 기득권 계층들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것이고,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중산층들은 비교적 교육 환경이 좋은 학군의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낸다. 문제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하류층이 몰려사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기보다는 사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적정 관리하는 데 주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에 의자와 책상, 교과서가 부족하다며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이면, 사회 기사로 신문의 지역 섹션에 이 사실이 보도되는 것이다. 그 이상 불만이 쌓여 학교 바깥의 폭력 사태로 번질 경우 사회 안정성에 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하반기 로스앤젤레스 통합구 일부 고교에선 같은 이유로 학내 시위가 벌어졌다. 이런 많은 문제점에도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기존 체제 기득권과 각을 세우고 부단히 문제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를테면 <뉴욕타임스>는 최근 부유층 자녀들의 전유물이 된 대학 조기입학제도와 AP 제도 등에 대해 비판적 기사를 내보냈고, <엘에이타임스>도 UCLA 입학생 가운데 흑인 비율이 매우 낮은 점을 들어 입학사정방식의 변화를 채근하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기존 기득권 세력 중심으로 채워지는 미국 교육 시스템에 그나마 비판의 칼날을 세우며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구실을 이들 소수 언론들이 하는 것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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