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우리 모두는 생존자들이다. 전쟁 생존자, 전쟁 같은 노동현장에서 살아남는 투쟁을 벌이는 노동 생존자, 참사 생존자, 굳이 화재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참사 같은 일상과의 투쟁을 아직도 벌이고 있는 생활 생존자. 그리고 성폭력 생존자. 쌍둥이라고 했다. ‘머시마가시내’라고 했다. 출산을 도운 할머니 입에서 마치 한 단어인 듯, 머시마가시내여, 머시마가시내이! 할 때 이미, 차마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그 복잡한, 복잡함이 다 뭔가, 치 떨리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의 ‘옛마을’ 사람들은 다 알았다. 머시마는 ‘죽어도’ 살릴 것이었다. 가시내는 어느 야심한 밤에 ‘대밭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이냔 말이다! ‘머시마가시내 쌍둥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기쁘고, 기쁘지만,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의 옛마을 사람들은 껄껄 웃으며, 웃음 뒤에 포옥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표현했다. 쌍둥이 가시내들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했고 너무나 감쪽같았다. 소위 ‘상피’(相避) 붙을지도 몰라서 누군가를 ‘대나무밭’ 속으로 보내야 한다면 그것이 가시내여야 한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우리의 ‘옛마을’들에서 ‘머시마가시내’ 쌍둥이로 태어났다가 ‘당연히, 감쪽같이’ 대나무밭 속으로 던져질 수도 있었으나, 운이 좋아 살아남은 쌍둥이 가시내들이야말로 아슬아슬한 ‘생존자’들이었음을 알겠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쌍둥이 머시마, 쌍쇠가 학교 다닐 때 저는 공장에 다녀야 했던 우리의 쌍례들을 아는가? 안다면 ‘생존자 쌍례’와 눈물겨운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 정희(가명)는 제재소집 딸이고 대학생이었다. 가족들은 말했다. “가시내가 학교 잘 다니다가 방학 때 집에 와서는 매급시 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광주는 폴새 전에 끝났는디.” 정희는 80년 5월에 광주에서 고등학생이었다. 광주는 난리지만 광주에 있었던 정희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희한테는 분명 무슨 일인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무슨 일’을 누구도 물을 수가 없었다. 짐작은 하지만 물어서 좋을 일이 없을 듯하였다. 필시 ‘폴새 전에 끝난 광주’에서 당한 ‘무슨 일’인가로 그랬을 것이라고 가족들은 말했고 오직 엄마만이, 그랬다고,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정희는 그때 그곳(광주)에서 무슨 일을 당했던 것일까. 무슨 일을 당했길래, ‘광주’ 끝난 지가 언젠데, 저희집 제재소 마당에서 제 몸에 기름을, 톱밥을 차례로 붓고 성냥불을 그어야만 했을까.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겪고도 살아남은 ‘광주사람’들이 아슬아슬한 ‘생존자’들인 것만 같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오랜 세월 짓눌리기도 했던 ‘생존자 광주사람’들에게 어떡하든 살아남아줘서 고맙다, 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 지난해 11월에 제주에서 세월호 생존자들의 전시회 ‘미치도록 살고 싶다’가 열렸다고 한다. 전시회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과 트라우마로 여전히 2014년 4월16일에 시간이 멈춰버린 생존자들의 ‘이제는 나의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에 다름 아니었다고 했다. 기자는 “경찰은 잠시 쉬려고 내리는 순간 그대로 추락했다는 생존자의 진술을 확보했습니다”라고 전한다. 부산의 공사장에서 추락사한 노동자들에 관한 뉴스다. 어느 반도체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게, 그래서 아직 생존해 있는 게 다행이라 여겨지면서도 병에 걸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어쩐지 미안하고 앞으로 느닷없이 백혈병 같은 게 오지 않을까 사는 게 늘 조마조마하죠.” ‘쌍쇠쌍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때 그곳, 광주에 살지 않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생존자들이다. 전쟁 생존자, 전쟁 같은 노동현장에서 살아남는 투쟁을 벌이는 노동 생존자, 참사 생존자, 굳이 화재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참사 같은 일상과의 투쟁을 아직도 벌이고 있는 생활 생존자들. 그리고 성폭력 생존자. 고등학교 다닐 때, 깨끗이 빨고 다린 교복을 입고 등교하려고 나선 골목, 공기는 투명하고 햇살은 맑은 월요일 이른 아침, 발걸음도 상쾌하게 걸어가고 있는 내 뒤에서 다가오는 남자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남자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소리. “우우우, 키워서 잡아먹자아, 우우우우, 키워서 잡아먹자….” 공기가, 햇살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나는 그 아침의 투명한 공기와 맑은 햇살조차 아주 오랫동안 미웠더랬다. 좀 과장하면 나도 그 시절 아주 ‘흔한 짐승’한테 잡아먹히지 않고 요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라고나 할까.
칼럼 |
[공선옥 칼럼] 생존자들 |
소설가 우리 모두는 생존자들이다. 전쟁 생존자, 전쟁 같은 노동현장에서 살아남는 투쟁을 벌이는 노동 생존자, 참사 생존자, 굳이 화재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참사 같은 일상과의 투쟁을 아직도 벌이고 있는 생활 생존자. 그리고 성폭력 생존자. 쌍둥이라고 했다. ‘머시마가시내’라고 했다. 출산을 도운 할머니 입에서 마치 한 단어인 듯, 머시마가시내여, 머시마가시내이! 할 때 이미, 차마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그 복잡한, 복잡함이 다 뭔가, 치 떨리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의 ‘옛마을’ 사람들은 다 알았다. 머시마는 ‘죽어도’ 살릴 것이었다. 가시내는 어느 야심한 밤에 ‘대밭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이냔 말이다! ‘머시마가시내 쌍둥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기쁘고, 기쁘지만,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의 옛마을 사람들은 껄껄 웃으며, 웃음 뒤에 포옥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표현했다. 쌍둥이 가시내들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했고 너무나 감쪽같았다. 소위 ‘상피’(相避) 붙을지도 몰라서 누군가를 ‘대나무밭’ 속으로 보내야 한다면 그것이 가시내여야 한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우리의 ‘옛마을’들에서 ‘머시마가시내’ 쌍둥이로 태어났다가 ‘당연히, 감쪽같이’ 대나무밭 속으로 던져질 수도 있었으나, 운이 좋아 살아남은 쌍둥이 가시내들이야말로 아슬아슬한 ‘생존자’들이었음을 알겠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쌍둥이 머시마, 쌍쇠가 학교 다닐 때 저는 공장에 다녀야 했던 우리의 쌍례들을 아는가? 안다면 ‘생존자 쌍례’와 눈물겨운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 정희(가명)는 제재소집 딸이고 대학생이었다. 가족들은 말했다. “가시내가 학교 잘 다니다가 방학 때 집에 와서는 매급시 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광주는 폴새 전에 끝났는디.” 정희는 80년 5월에 광주에서 고등학생이었다. 광주는 난리지만 광주에 있었던 정희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희한테는 분명 무슨 일인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무슨 일’을 누구도 물을 수가 없었다. 짐작은 하지만 물어서 좋을 일이 없을 듯하였다. 필시 ‘폴새 전에 끝난 광주’에서 당한 ‘무슨 일’인가로 그랬을 것이라고 가족들은 말했고 오직 엄마만이, 그랬다고,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정희는 그때 그곳(광주)에서 무슨 일을 당했던 것일까. 무슨 일을 당했길래, ‘광주’ 끝난 지가 언젠데, 저희집 제재소 마당에서 제 몸에 기름을, 톱밥을 차례로 붓고 성냥불을 그어야만 했을까.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겪고도 살아남은 ‘광주사람’들이 아슬아슬한 ‘생존자’들인 것만 같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오랜 세월 짓눌리기도 했던 ‘생존자 광주사람’들에게 어떡하든 살아남아줘서 고맙다, 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 지난해 11월에 제주에서 세월호 생존자들의 전시회 ‘미치도록 살고 싶다’가 열렸다고 한다. 전시회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과 트라우마로 여전히 2014년 4월16일에 시간이 멈춰버린 생존자들의 ‘이제는 나의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에 다름 아니었다고 했다. 기자는 “경찰은 잠시 쉬려고 내리는 순간 그대로 추락했다는 생존자의 진술을 확보했습니다”라고 전한다. 부산의 공사장에서 추락사한 노동자들에 관한 뉴스다. 어느 반도체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게, 그래서 아직 생존해 있는 게 다행이라 여겨지면서도 병에 걸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어쩐지 미안하고 앞으로 느닷없이 백혈병 같은 게 오지 않을까 사는 게 늘 조마조마하죠.” ‘쌍쇠쌍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때 그곳, 광주에 살지 않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생존자들이다. 전쟁 생존자, 전쟁 같은 노동현장에서 살아남는 투쟁을 벌이는 노동 생존자, 참사 생존자, 굳이 화재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참사 같은 일상과의 투쟁을 아직도 벌이고 있는 생활 생존자들. 그리고 성폭력 생존자. 고등학교 다닐 때, 깨끗이 빨고 다린 교복을 입고 등교하려고 나선 골목, 공기는 투명하고 햇살은 맑은 월요일 이른 아침, 발걸음도 상쾌하게 걸어가고 있는 내 뒤에서 다가오는 남자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남자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소리. “우우우, 키워서 잡아먹자아, 우우우우, 키워서 잡아먹자….” 공기가, 햇살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나는 그 아침의 투명한 공기와 맑은 햇살조차 아주 오랫동안 미웠더랬다. 좀 과장하면 나도 그 시절 아주 ‘흔한 짐승’한테 잡아먹히지 않고 요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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