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창이 없는 집을 집이랍시고 돈 받고 내놓는 행위가 적어도 불법이 되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책을 만드는 이들도 혹시 창문 많은 집을 몇 채씩 가진 이들이라서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아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광고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일까. 옛날에 유럽에서는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을 매겼다고 한다. 그럴 때 창문은 부의 상징인 셈이다. 중세 유럽에서와는 또다른 의미로 창문이 있고 없고에 따라 방값이 달라지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는 사실 앞에, 나는 참담해진다. 창문 있는 방은 32만원, 없는 방은 28만원이란다. 창문이 크면 20만원, 창문이 작으면 18만원이란다. 빛과 공기가 들어오도록 건물 벽에 만들어놓은 개구부인 창문은 이 시대에도 그렇게 돈과 연결된다. 그리고 때로는 생사를 가르는 문이 되기도 한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나오는 노인은 창문 넘어 도망친 결과 신나는 모험의 시간을 살게 되지만, 창문이 있다 해도 그 창문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다른 고시원에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창문 없는 방에서 산다는 것은, 그것도 한평 반의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바람은/ 혹은 바람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없는 바람마저 뼛속을 누빈다/ 뼛속을 빼고는 관 속처럼 아늑하더라/ 창문 없는 내 방이여…”(차창룡 ‘고시원에서’)라고 시인은 썼다. 시인의 말처럼 관 속처럼 아늑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창문이 있어도 창문을 열 수 없는 집에 산 적이 있다. 창문은 골목 쪽으로 나 있었고 창문을 열면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집, 아니 우리 방을 다 들여다볼 수 있어서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창문 있는 방의 공포를 못 견디고 나는 창문이 없어서 ‘아늑’한 방으로 옮겨갔다. 나는 그래서 창문 없는 방이 ‘관 속’이라는 것을 안다. 작가 김하기 소설 제목처럼 ‘살아 있는 무덤’ 같은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50채가 넘는 집을 가진 사람들은 창문을 몇 개나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그 창문 안에서 창문 밖 세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 양귀자처럼 그들도 “따뜻한 내 집 창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할까? 그 많은 창문 있는 집을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적어도 ‘창이 큰 집에서 사는 아이는 꿈도 크게 꾼다’는 광고를 아무런 불편 없이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가진 이라면 아무리 창문 많은 집을 가졌다 해도 그 마음의 창문은 세상으로부터 닫혀 있음을 그들이 알까. 창이 없는 집을 집이랍시고 돈 받고 내놓는 행위를 누군가 하고 있다면 그런 행위가 적어도 불법이 되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책을 만드는 이들도 혹시 창문 많은 집을 몇 채씩 가진 이들이라서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아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광고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일까. 그들은 혹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고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라고 묻는 한 시인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가난했던 화가 박수근의 가난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을 창 넓은 집 거실에 걸어두고 창밖에서 울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상상력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있어 박완서 선생은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집을 쉰 채나 갖고 있는 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집을 빼앗아간 도둑이니 그들이 가진 집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을 하면 내가 도둑 소리를 들을 터이기에, 차마 겁나서 자제하기로 한다. 다만 창문에다는 세금을 매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집에다는 세금을 좀 세게 매겨서 그 돈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햇살 들어오는 창문이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창문 없는 집에 살면서 울고 있는 이들을 위한 집을 지어달라는 말 정도는 해야겠다. 그런데 집 가진 사람들을 무슨 범법자 취급한다고 또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뿐이랴. 도둑보다 더 나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좌빨’이라고 일갈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나같이 경제문제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암만 생각해도 뭔가를 독점한다는 것이 실은 시장경제를 교란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이 딱 그뿐인 사람들 같다. 왜냐하면 내 자유가 누군가의 자유를 방해한다면 내 자유는 누군가에게 억압이 될 터이고 독점이란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일 터이기에. 상상력도 돈이 필요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주장하고 싶겠지만, 돈이 필요한 상상은 돈 가진 그들이나 하라고 하고 돈 안 들어가는 상상을 나는 하고 싶다. 돈 많이 안 쓰고도 ‘창문 큰 집에서 사는’ 꿈, 아니 크지 않아도 작은 창문이라도 있는 집에 사는 꿈.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상상은 결국 돈이 들어가야만 실현될 현실인가? 우리가 일구는 세상이 겨우 그 정도인가?
칼럼 |
[공선옥 칼럼] 창문 |
소설가 창이 없는 집을 집이랍시고 돈 받고 내놓는 행위가 적어도 불법이 되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책을 만드는 이들도 혹시 창문 많은 집을 몇 채씩 가진 이들이라서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아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광고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일까. 옛날에 유럽에서는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을 매겼다고 한다. 그럴 때 창문은 부의 상징인 셈이다. 중세 유럽에서와는 또다른 의미로 창문이 있고 없고에 따라 방값이 달라지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는 사실 앞에, 나는 참담해진다. 창문 있는 방은 32만원, 없는 방은 28만원이란다. 창문이 크면 20만원, 창문이 작으면 18만원이란다. 빛과 공기가 들어오도록 건물 벽에 만들어놓은 개구부인 창문은 이 시대에도 그렇게 돈과 연결된다. 그리고 때로는 생사를 가르는 문이 되기도 한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나오는 노인은 창문 넘어 도망친 결과 신나는 모험의 시간을 살게 되지만, 창문이 있다 해도 그 창문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다른 고시원에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창문 없는 방에서 산다는 것은, 그것도 한평 반의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바람은/ 혹은 바람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없는 바람마저 뼛속을 누빈다/ 뼛속을 빼고는 관 속처럼 아늑하더라/ 창문 없는 내 방이여…”(차창룡 ‘고시원에서’)라고 시인은 썼다. 시인의 말처럼 관 속처럼 아늑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창문이 있어도 창문을 열 수 없는 집에 산 적이 있다. 창문은 골목 쪽으로 나 있었고 창문을 열면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집, 아니 우리 방을 다 들여다볼 수 있어서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창문 있는 방의 공포를 못 견디고 나는 창문이 없어서 ‘아늑’한 방으로 옮겨갔다. 나는 그래서 창문 없는 방이 ‘관 속’이라는 것을 안다. 작가 김하기 소설 제목처럼 ‘살아 있는 무덤’ 같은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50채가 넘는 집을 가진 사람들은 창문을 몇 개나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그 창문 안에서 창문 밖 세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 양귀자처럼 그들도 “따뜻한 내 집 창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할까? 그 많은 창문 있는 집을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적어도 ‘창이 큰 집에서 사는 아이는 꿈도 크게 꾼다’는 광고를 아무런 불편 없이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가진 이라면 아무리 창문 많은 집을 가졌다 해도 그 마음의 창문은 세상으로부터 닫혀 있음을 그들이 알까. 창이 없는 집을 집이랍시고 돈 받고 내놓는 행위를 누군가 하고 있다면 그런 행위가 적어도 불법이 되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책을 만드는 이들도 혹시 창문 많은 집을 몇 채씩 가진 이들이라서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아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광고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일까. 그들은 혹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고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라고 묻는 한 시인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가난했던 화가 박수근의 가난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을 창 넓은 집 거실에 걸어두고 창밖에서 울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상상력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있어 박완서 선생은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집을 쉰 채나 갖고 있는 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집을 빼앗아간 도둑이니 그들이 가진 집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을 하면 내가 도둑 소리를 들을 터이기에, 차마 겁나서 자제하기로 한다. 다만 창문에다는 세금을 매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집에다는 세금을 좀 세게 매겨서 그 돈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햇살 들어오는 창문이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창문 없는 집에 살면서 울고 있는 이들을 위한 집을 지어달라는 말 정도는 해야겠다. 그런데 집 가진 사람들을 무슨 범법자 취급한다고 또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뿐이랴. 도둑보다 더 나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좌빨’이라고 일갈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나같이 경제문제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암만 생각해도 뭔가를 독점한다는 것이 실은 시장경제를 교란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이 딱 그뿐인 사람들 같다. 왜냐하면 내 자유가 누군가의 자유를 방해한다면 내 자유는 누군가에게 억압이 될 터이고 독점이란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일 터이기에. 상상력도 돈이 필요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주장하고 싶겠지만, 돈이 필요한 상상은 돈 가진 그들이나 하라고 하고 돈 안 들어가는 상상을 나는 하고 싶다. 돈 많이 안 쓰고도 ‘창문 큰 집에서 사는’ 꿈, 아니 크지 않아도 작은 창문이라도 있는 집에 사는 꿈.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상상은 결국 돈이 들어가야만 실현될 현실인가? 우리가 일구는 세상이 겨우 그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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