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우리 아들보다 한 살 많은 용균이는, 생긴 것도 우리 아들하고 비슷하다. 얼굴에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도 않은 용균이가 방에 신문지를 펴놓고 그 위에서 새 양복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수줍은 듯 해맑게 웃으며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던 것은 부모님을 앞에 두고였을 것이다. 생애 처음 직장에 취직하는 아들의 풋풋한 모습에 행복해했을 그 어버이는 그로부터 석달 뒤 아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지하 탄광보다 열악한 곳이 지금 이 시대에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문재인 대통령이 책임지고 이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하나하나 다 밝혀서 국민께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통곡의 말이다. 정규직이 석달간 받는 안전교육을 단 2주 만에 마친 용균이가 투입된 일터는 ‘석탄먼지로 시야가 흐리고, 곳곳에 턱이나 장애물과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지붕이 낮아서 600~700m의 컨베이어벨트를 기어서 넘나들어야 하고, 사방이 고속회전체인 작업환경 속에서 호스나 남은 자재, 석탄먼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곡예를 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12월10일 저녁 6시30분에 출근했던 용균이가 동료에 의해 발견된 것은 11일 새벽 3시가 넘어서였다. 이 일은 어떻게 이렇게 되었고, 이렇게 되도록 누가 만들었는가. 1998년 2월20일, 외환위기 때다. ‘노동유연화’라는 명목 아래 ‘정리해고법’과 ‘파견근로자보호법’이 도입됐다. 노동유연화라!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말이 하도 멋져서 그 말이 누군가의 가정을 파탄내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몰랐다. ‘구조조정’이라는 언뜻 전문가스러운 말이 노동자를 맘대로 해고해도 된다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듯이. ‘파견근로자보호법’이라는 것은 일할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이미 해고한 노동자들을 하청회사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인바, ‘비정규직’ 노동자 시대를 만든 근거가 되는 법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이름은 생겨난 지 20년 동안 낯설고 불편한 채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파견근로자보호법’이 파견근로자들의 몸을, 영혼을, 생활을 보호하기는커녕 파괴하는 법이듯이, 2006년 11월30일 태어난 ‘비정규직보호법’에 붙은 보호라는 아름다운 말 또한 그 얼마나 악랄하게 이용되고 있는 경우란 말인가. 정리해고법과 파견근로자보호법에 의해서 생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생긴 그 법이란, 2년 동안 일한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인바, ‘비정규직보호법’이야말로 2년이 되기 전에 노동자를 해고했다가 필요하면 또 불러다 쓰라는 단기계약직, 비정규직 양산법이 아니었던가. 그 법이 통과되던 날,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천영세 의원은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집권여당과 제1야당이 강행 처리한 법안으로 참담한 비정규직 시대를 열었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임시직·계약직의 나라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절규했고, 권영길 의원은 “우리 세대와 미래 세대의 노동자를 빈곤과 착취로 내모는 역사적 범죄행위”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현실은 천영세·권영길 의원이 예언했던 그대로다. 처음에는 이것이 뭔 새로운 말인가 어리둥절하다가 차츰 귀에 익으니, 그 말이 나를 잡아먹고 이 시대를 잡아먹고 일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잡아먹는 말이 되고 말았다. 현재 국회에는 위험한 일은 외주를 못 주게 하는 내용이 골자인 ‘산업안전보건법’이 발의되어 있는 모양이다. 2013년에 발의됐다가 ‘도급 금지는 계약 체결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경영계의 반발로 태어나지 못하고 19대 국회에서 폐기되었다가 다시 논의가 되고 있다고 한다. 계약 체결의 자유! 그럴 때의 자유란 어떤 자유인가. 그 ‘보호’는, 그 ‘자유’는 얼마나 많은 ‘김군들’이, 그 착하고 해맑은, 채 여드름 자국도 가시지 않은 우리의 아들들이, 유품이라고 남긴 것이 컵라면뿐인 우리 새끼들이 죽어나가야 멈출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묻는다. 누가 김용균을 죽였는가? 누가 이 젊은이들의 죽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우리 정부는 2001년에 아이엠에프(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으면서 아이엠에프 관리 체제를 종료했다고 했다. 하지만 죽음의 외주화 체제를 끝내지 않는 한 ‘아이엠에프 체제’는 결코 종료되지 않았다!
칼럼 |
[공선옥 칼럼] 누가 김용균을 죽였는가 |
소설가 우리 아들보다 한 살 많은 용균이는, 생긴 것도 우리 아들하고 비슷하다. 얼굴에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도 않은 용균이가 방에 신문지를 펴놓고 그 위에서 새 양복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수줍은 듯 해맑게 웃으며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던 것은 부모님을 앞에 두고였을 것이다. 생애 처음 직장에 취직하는 아들의 풋풋한 모습에 행복해했을 그 어버이는 그로부터 석달 뒤 아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지하 탄광보다 열악한 곳이 지금 이 시대에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문재인 대통령이 책임지고 이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하나하나 다 밝혀서 국민께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통곡의 말이다. 정규직이 석달간 받는 안전교육을 단 2주 만에 마친 용균이가 투입된 일터는 ‘석탄먼지로 시야가 흐리고, 곳곳에 턱이나 장애물과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지붕이 낮아서 600~700m의 컨베이어벨트를 기어서 넘나들어야 하고, 사방이 고속회전체인 작업환경 속에서 호스나 남은 자재, 석탄먼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곡예를 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12월10일 저녁 6시30분에 출근했던 용균이가 동료에 의해 발견된 것은 11일 새벽 3시가 넘어서였다. 이 일은 어떻게 이렇게 되었고, 이렇게 되도록 누가 만들었는가. 1998년 2월20일, 외환위기 때다. ‘노동유연화’라는 명목 아래 ‘정리해고법’과 ‘파견근로자보호법’이 도입됐다. 노동유연화라!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말이 하도 멋져서 그 말이 누군가의 가정을 파탄내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몰랐다. ‘구조조정’이라는 언뜻 전문가스러운 말이 노동자를 맘대로 해고해도 된다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듯이. ‘파견근로자보호법’이라는 것은 일할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이미 해고한 노동자들을 하청회사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인바, ‘비정규직’ 노동자 시대를 만든 근거가 되는 법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이름은 생겨난 지 20년 동안 낯설고 불편한 채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파견근로자보호법’이 파견근로자들의 몸을, 영혼을, 생활을 보호하기는커녕 파괴하는 법이듯이, 2006년 11월30일 태어난 ‘비정규직보호법’에 붙은 보호라는 아름다운 말 또한 그 얼마나 악랄하게 이용되고 있는 경우란 말인가. 정리해고법과 파견근로자보호법에 의해서 생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생긴 그 법이란, 2년 동안 일한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인바, ‘비정규직보호법’이야말로 2년이 되기 전에 노동자를 해고했다가 필요하면 또 불러다 쓰라는 단기계약직, 비정규직 양산법이 아니었던가. 그 법이 통과되던 날,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천영세 의원은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집권여당과 제1야당이 강행 처리한 법안으로 참담한 비정규직 시대를 열었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임시직·계약직의 나라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절규했고, 권영길 의원은 “우리 세대와 미래 세대의 노동자를 빈곤과 착취로 내모는 역사적 범죄행위”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현실은 천영세·권영길 의원이 예언했던 그대로다. 처음에는 이것이 뭔 새로운 말인가 어리둥절하다가 차츰 귀에 익으니, 그 말이 나를 잡아먹고 이 시대를 잡아먹고 일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잡아먹는 말이 되고 말았다. 현재 국회에는 위험한 일은 외주를 못 주게 하는 내용이 골자인 ‘산업안전보건법’이 발의되어 있는 모양이다. 2013년에 발의됐다가 ‘도급 금지는 계약 체결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경영계의 반발로 태어나지 못하고 19대 국회에서 폐기되었다가 다시 논의가 되고 있다고 한다. 계약 체결의 자유! 그럴 때의 자유란 어떤 자유인가. 그 ‘보호’는, 그 ‘자유’는 얼마나 많은 ‘김군들’이, 그 착하고 해맑은, 채 여드름 자국도 가시지 않은 우리의 아들들이, 유품이라고 남긴 것이 컵라면뿐인 우리 새끼들이 죽어나가야 멈출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묻는다. 누가 김용균을 죽였는가? 누가 이 젊은이들의 죽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우리 정부는 2001년에 아이엠에프(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으면서 아이엠에프 관리 체제를 종료했다고 했다. 하지만 죽음의 외주화 체제를 끝내지 않는 한 ‘아이엠에프 체제’는 결코 종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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