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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13 17:34 수정 : 2019.01.14 09:32

아이들의 반짝이는 미래를 열어줘야 할 어른들의 현실은 결코 반짝이지 않는다.
반짝임을 잃은 현실이 반짝이는 미래를 열 수는 없다.
그것이 내 무섬증의 실체일 것이다.

공선옥
소설가

새해부터는 이리이리하겠다, 속으로 결심해놓은 것이 몇가지 있었다. 최대한 옛날식으로 살아보기라는 좀 큰 생각 상자 안에 세세한 결심들이 때글때글했다. 글을 컴퓨터로 쓰지 말고 종이에 펜으로 쓰기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글도 컴퓨터로 쓰고 있다. 컴퓨터로 자판을 눌러서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생각이 진척되지 않고, 생각을 손이 따라잡기 힘들고, 무엇보다 손으로 다 쓴 글을 우체국에 가서 부쳐야 하고, 나야 부치면 끝날 일이지만, 그 글을 받아본 한겨레신문사 담당자는 가뜩이나 바쁜데 내 글을 다시 컴퓨터에 입력해야 하는 일거리가 생길 것이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단순노동을 하면서 나한테 얼마나 욕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겁나서 못하겠다.

내 일기나 그렇게 쓴다면 모를까 남들한테 못할 일까지 시키는 결과가 될 일은 차마 못할 짓이다. 다른 한가지는 ‘비니루’ 안 쓰기.

그러나 시장에서, 그것도 시골 오일장에서 비닐봉지 안 쓰고 장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가는 오일장 상인들은 상당수가 저울이 없다. ‘비니루 봉다리’가 저울이다. 시장 두부가 맛있어서 그릇을 챙겨 가서 사려고 했더니, 두부장수가 ‘뭣 하려고 그리 복잡하게 사냐’며 내가 내미는 그릇을 ‘무작스럽게’ 쳐내버리고는 잽싸고도 익숙한 동작으로 비닐봉지에 싸준다. 두부 사 온 비닐봉지는 젖어 있다. 젖은 비닐봉지를 말리느라고 싱크대 한쪽에 걸어둔다. 비감해진다. 두부는 여전히 맛이 있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 마침 필리핀으로 갔던 한국 쓰레기가 다시 돌아온다는 뉴스가 나온다. 죄인처럼 움츠러든다.

김장도 다 해놓고 땔감도 쟁여놓고 마음 단단히 먹고 겨울아, 올 테면 오려무나, 기다렸건만, 올겨울은 겨울이 아니다. 없는 사람한테는 따뜻한 겨울이 좋기는 좋지마는, 농부들에게는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 눈 한번 오지 않는 메마른 겨울이 왠지 불길하다. 이곳 남쪽은 눈은 고사하고 비도 안 온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에서 정전기가 인다. 겨울에 때 아닌 파리가 날아다닌다. ‘겨울 파리’는 뭔가 묵시록적 상황의 도래를 알리는 전초병일까. 지난봄에 벌 치는 농부가 올해는 벌이 안 온다고, 꽃이 없다고, 꿀농사는 망쳤다고, 무섭다고, 뭔가가 무섭다고 했다. 파리를 잡다가 벌을 생각한다. 눈 안 오는 겨울 지나면 벌 안 오는 봄이 올까, 오싹해진다.

1월이면 언제나 ‘용산’이 생각난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날도 추웠고 마음도 추웠다. 내가 바라지 않던 사람이 대통령이어서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치받치던 때였다. 그리고 불이 났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불길 속에서 죽어갔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10년이 지난 지금, 사람이 죽어간 바로 그 자리에 시치미 딱 떼고 들어선 빌딩 옆을 지나며 나는 난감해지고 처치 곤란한 감정에 휩싸이면서 속이 상하고 민망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왈칵 무섬증을 느낀다.

하기야 무려 오백여명이 매몰된 삼풍백화점 자리에도 아파트가 올라가지 않았는가. 청년 노동자 김용균이 갈가리 찢겨 죽어간 발전소는 그가 죽기 전이나 한가지나 오늘도 잘 돌아가고 있지 않나.

방학을 했는데도 골목에 아이들이 나오지 않아 궁금했는데 아이들 서넛이 정류장에서 광주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 가냐 했더니 전남대학교 후문에 간다고 한다. 전남대학교 후문 앞은 온갖 상점과 술집이 빼곡하다. 산으로 들로 나가 놀지 않느냐고 했더니 시골은 재미없다고 한다. 전남대학교 후문 앞 피시방과 햄버거가게와 극장과…. 또 아이들을 유혹하는 곳이 어디일까. 문득 북한 아이들은 방학에 어디서 어떻게 노는지가 궁금해진다. 미국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은, 자메이카 아이들은, 이집트 아이들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겨울이, 눈 안 오는 겨울이 아니기를, 벌나비 나는 봄이기를, 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맞는 모든 아침과 저녁이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는 세상의 어른들은 사람이 죽어 나간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빌딩을 올리고 사람이 죽어 나간 공장을 아무렇지 않게 돌리고 있다. 돈, 돈, 돈 하면서 돌리고 있다. 그 아이들의 반짝이는 미래를 열어줘야 할 어른들의 현실은 결코 반짝이지 않는다. 반짝임을 잃은 현실이 반짝이는 미래를 열 수는 없다. 그것이 내 무섬증의 실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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