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경제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살아도 경제의 한축인 노동의 가치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노동을 천대하면 모두가 천대받을 것이고 노동을 존중하면 모두가 존중받을 것이라는 평범하고 당연한 말이 ‘지금, 여기’에서는 사뭇 어려운 명제가 되고 말았다.
소설가 백조가 눈에 안 보이는 물속의 처절한 다리운동 덕분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낼 수 있듯이, 이 세상 모든 우아한, 쾌적한, 아름다운… 하여간 모든 좋은 것 뒤에는 우아하고 쾌적하고 아름답고 좋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들이 열심히 ‘다리 운동’을 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만큼의 지성을, 지성이 좀 과하다고 한다면 상식을 가진 학생들이 다니는 한국의 ‘어떤’ 대학교, 이 대학교 이름을 ‘물속의 달 대학교’라고 하자. 이 물속의 달 대학교 기계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의 권리 중의 하나인 ‘파업권'을 쓰느라 기계실 작동을 중단했다. 변리사, 공인회계사, 행정고시 등등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생들이 밤낮으로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도 난방이 중단되어 ‘손이 시려 글씨도 잘 써지지 않을 정도’로 온기가 떨어졌고 학생들이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에게 짜증을 냈다. 이 학교, 그러니까 물속의 달 대학교에서는 그래서 노동자의 파업권과 학생들의 학습권을 주장하는 사이에 대토론이 벌어졌다. 손이 시려 글씨도 안 써지는 추위에 떨게 한 노조 파업 너무하네,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학생들의 학업 방해를 선택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인질극하고 뭐가 다른가…. 노동자들에게 온갖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에게 마침 그 학교 한 교수가 이번 기회에 ‘그동안 내 손이 시리지 않은 환경’을 제공해준 누군가의 수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한마디 한 것이 대토론의 시작이었다. 마침 전공이 ‘사회학’인지라 이 교수는 자신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파업권 행사’가 학생들과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노동'에 대한 이야기와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학생들은 의외로 완강했다. 미래의 인재를 소중히 할 줄 모르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일갈하듯이 말하는 학생에게 교수는 노동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나라에 미래가 있는지를 물었다. 연구하는 도서관과 연구실의 난방을 볼모로 하는 파업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고 핏대 세우는 학생에게 사회학 교수는 노동자들의 노동 덕분으로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학생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긴지를 물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자신들을 자꾸 미래의 인재라 말하니 그럼 노동자는 현재의 인재가 아니냐고도 물었다. 어떤 학생은 꽤 거칠었다. 지금 기계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가정부가 보일러실 점거하고 집주인 행세 하는 꼴’이라고 말하는 학생에게 교수는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학생들이 기계실 노동자가 노동력 제공하기를 중단하자 금세 고통스러워하듯이, 세상에 노동하는 사람이 없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노동은 소외되고 천대받고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말은 공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펍(세상)을 자세히 묘사해놨는데, 현실의 오웰에게 ‘물속의 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미래의 인재라면 그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을 왜 현재의 인재라고 할 수 없는가, 라고 묻는 한국의 ‘물속의 달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님’의 존재를 나도 아직 모른다. 작가 임흥순의 영화 <위로공단>을 다시 보았다. 인터뷰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거개가 눈물을 보였다. 노동자는 과도하게 권리를 침해받았고 천시받았다는 것을 그 눈물이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도 노동자보다 자본가 만나기를 더 잘한다. 우리는 경제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살아도 경제의 한축인 노동의 가치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노동자가 파업할 때 파업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며 노동의 소중함을 다시금 알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살피고 배려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시되는 세상’은 조지 오웰의 ‘물속의 달’처럼 정녕 오지 않을, 불가능한 세상일까? 노동을 천대하면 모두가 천대받을 것이고 노동을 존중하면 모두가 존중받을 것이라는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한 말이 ‘지금, 여기’에서는 사뭇 어려운 명제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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