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기획, 동백에 묻다⑬
30년 전 국정감사에 4·3 처음 진술한 이상하씨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한날 한시에 처형
조부모부터 조카까지 7명이 죽고 형은 행방불명
처형장에서 살아난 이씨는 ‘하늘이 내려준 아이’
“쏜 사람은 누구입니까?”
“중문지서의 경찰입니다.”
“가족을 쏜 사람이 경찰관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1989년 9월24일 새벽 5시. 13대 국회 내무위원회의 제주도청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 의원들의 질문과 증인으로 나선 한 제주도민의 답변 내용이다. 가족을 쏜 사람이 경찰관이라는 답변 내용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이날의 증인은 이상하(84·서귀포시 중문동)씨. 국정감사 속기록을 보면, 이씨는 전날인 9월23일 열린 국정감사장에서 14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튿날 새벽 5시 가까이 돼서야 증인석에 설 수 있었다. 20분 남짓 증인석에 서기 위해 14시간을 기다린 이씨는 이날 한 국회의원이 사전에 약속한 말만 하라는 말에도 “진실을 말하겠다”며 4·3 당시 가족의 피해상황을 통해 밝혔다.
금기시됐던 제주4·3이 피해자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국정감사장에 전달된 순간이었다. 이날 취재했던 기자는 지난 6일 30년 만에 이씨를 만났다. 이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사실을 말했는데도 한 국회의원은 믿지 않더구만. 내 말을 절대로 믿지 않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어”라며 웃었다.
|
김상하씨가 제주4·3 당시 가족이 희생된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회수리의 밭을 찾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처음으로 4·3을 말한 순간…국회의원은 믿지 않았다
1948년 12월17일 오전 8시께, 중문면(현 서귀포시 중문동) 회수리 향사 옆 이씨의 집에서는 일가친지 등 20~30여명의 상두꾼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끝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지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은 사흘전 경찰에 희생된 할아버지(이원옥·당시 71)와 할머니(강주향·당시 64)의 장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을에서 1.5㎞ 남짓 떨어진 지금의 중문고등학교 인근에서 토속종교를 믿으며 인근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서당을 운영하다 12월15일 희생됐다.
|
제주4·3 때 온 가족을 잃은 이상하씨가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울먹이고 있다.
|
중문지서 순경 한 명과 죽창을 든 학생들로 구성된 청년단 3~4명이 장지로 갈 준비에 바쁜 이씨의 집에 들이닥쳤다. 경찰은 이씨의 아버지(이두현·당시 48)와 어머니(강태사·당시 46)한테 ‘나오라’고 다그쳤다. 아버지는 집에 있던 식구들에게도 모두 오라고 해서 같이 나갔다. 13살이던 이씨와 누나(이화선·당시 16), 형님(이기하·당시 25)의 아들(이길팔·당시 7)·딸(이춘자·당시 6) 등 6명이 함께 나갔다. 친척과 이웃들이 모여 장례식 준비로 분주하던 집 마당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씨는 “나나 누나, 조카들은 데려가지 않아도 좋았지만, 아버지가 고지식해서 모두 나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전에도 몇번 지서에서 호출해 갔었지만 내보낸 적이 있어 괜찮을 줄 알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올레로 나온 이씨 가족을 밭으로 가도록 내몰고, 집에 있던 일가친지들에게 구경하라고 했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일가족 전멸
겨울이었지만 춥지 않은 청명한 날이었다. 이씨 가족들은 앞동산을 내려와 밭으로 갔다. 중산간 마을인 회수리는 밭농사를 주로 했다. 이씨 가족도 고구마와 조, 메밀농사를 지었다. 경찰은 이씨 가족들에게 돌아서서 앉으라고 했다. 죽음을 예감한 듯 아버지는 손자를 안고, 할머니는 손녀를 안은 채 엉거주춤 앉았다. 누나와 중문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이씨도 같이 앉았다. 친척과 이웃들은 이런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처형의 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겠다고 했다. 혹시나 살려줄까봐 그렇게 한 것 같다고 이씨는 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만세’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99식 일제 소총의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이씨는 본능적으로 엎드렸다. 이씨는 “일제시대에 국민학교 다닐 때 ‘공습경보’라고 외치며 종을 치면 달려가다 엎드리는 연습을 많이 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엎어졌던 것 같다”고 했다.
|
제주도에서 열린 국회 내무위 1반의 국정감사장에서 증인석 선 이상하씨의 사연을 보도한 1989년 9월25일치 <제주신문> 기사.
|
경찰은 길가에서 밭에 있던 이씨 가족들에게 총을 쏜 뒤 다시 가까이 다가가 쓰러진 이씨 가족들을 확인사살했다. 이씨의 머리를 겨냥했던 총알은 목을 비껴갔다. 총알이 땅에 박히면서 흙이 튀겨 입 안으로 흙이 들어갔다. 이씨는 “총을 쐈다고 즉사하는 게 아니니까 와서 확인해서 쏘았는데 다행히 나는 맞지 않았다. 총알이 땅이 박혀 흙이 입에 들어가 말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어 살아났다. 할아버지가 안고 있던 형의 아들은 허벅지에 총을 맞았지만 현장에서 죽지 않았다. “그 사람(순경)도 겁이 났는지 조카가 울고 있었는데도 그냥 갔어. 마을 궂은 일을 보는 소사 할아버지가 똑똑한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날 담요로 싸서 친족집에 데리고 갔지. 조카도 데려갔지만 조카는 밤새 울다가 죽었어.”
아버지는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이어 아버지와 어머니, 열여섯 꽃다운 나이의 누나, 7살·6살 어린 조카 등 5명이 한날한시에 희생됐다. 이씨 가족의 희생은 형이 4·3 뒤 산으로 도피한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날은 중문면 관내인 회수리와 중문리 신사터 등에서 이른바 도피자 가족 수십명이 토벌대에 집단학살된 날이었다. 토벌대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에 있던 사람들을 학살했다.
1948년 10월17일 제주도 토벌에 나선 9연대가 해안선으로부터 5㎞ 밖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하고, 11월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하면서 제주도는 학살의 섬으로 변했다. 11월5일 중문면사무소와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뒤 서북청년들로 구성된 9연대 특별중대가 중문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중문지서에는 제주 출신 경찰 이외에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이 보강됐다.
|
1948년 11월17일의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문서.
|
중문면사무소와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뒤 이씨 가족은 지서에 소환돼 갔었지만, 이씨와 누나는 당일 돌아왔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튿날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런 일 때문에 별탈 없이 지날 것으로 알았지만,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지서 습격을 받은 뒤 서귀포에서 중문리로 걸어서 출동하던 9연대 군인들이 회수리에 들렀다. 군인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도피자 가족’의 집이라며 형이 살던 박거리(바깥채)에 수류탄을 던졌다. 마침 가을철 수확했던 조를 마루에 쌓아둔 덕분으로 수류탄 위로 조짚이 넘어지는 바람에 불이 붙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버지는 오해를 살까봐 자기 손으로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씨는 “그렇게라도 하면 살려줄게 아니냐고 생각했던 같다”고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징병됐던 형은 ‘청년 중에서도 일청년’이었다고 이씨는 기억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마을대항 체육대회를 열면 체격이 좋았던 형은 달리기와 씨름선수로 동네에서 이름을 날렸다. 산으로 도피했던 형은 이듬해인 1949년 3월께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삐라를 보고 회수리로 내려왔다. 형은 회수리 주민한테 “동생을 잘 봐달라”고 말한 뒤 서귀포경찰서로 간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해 8월 제주비행장에서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형은 행방불명됐다.
하늘이 살린 아이
온 가족이 절멸되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씨를 떠맡게 된 친족은 불안했다. 열흘 정도 지난 뒤 친족은 지인을 통해 당시 지서를 책임지던 군 장교(소위)에게 “아이가 살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소위는 이씨를 데려오도록 했다.
|
이상하씨.
|
“내가 직접 지서에 갔어. 가니까 그 소위가 하는 말이 ‘이 아이는 하늘이 살린 아이니까 군대에서 데리고 다니겠다’고 했어. 친척들이 그 말을 듣고 ‘허가만 해주면 우리가 살릴 수 있다’고 사정해서 친족집에 살게 됐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이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친족집에 살던 이씨는 얼마 뒤 친척 할머니와 함께 옛 집으로 옮겨갔다. 4·3이 나기 전 시집 간 큰 누나(당시 22)가 전쟁이 발발한 뒤 매형이 군대에 징집되자 집으로 와 2년을 함께 살았다.
가족 제사는 그때부터 지냈다. 이씨는 “처음에는 누님이 제사를 지냈다. 당시 하루 세끼를 제상에 올렸는데 모두 올리면 명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밥을 다 먹어야 해서 더운 밥을 먹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아가 된 뒤에도 중학교를 다녔다. 제주시에서 상고를 졸업한 뒤 대학에 입학했다. 1957년께 대학 한 학기를 다닌 뒤 2학기 등록금이 없어 일본 도쿄에서 사는 친척을 찾아 밀항을 시도했다. 일본 나가사키현의 어느 섬에서 잡혀 사세보형무소에서 8개월을, 오무라수용소에서 1년4개월을 산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 3년 군대생활을 하고 1962년 제대해 고향 회수리에서 인근 중문리로 옮겼다. 1970년에는 일본 도쿄에 살며 1년 동안 감귤재배기술을 배워 감귤 재배의 선구자가 됐다. 당시 양돈 기술도 배웠다.
어릴 때 가족의 처형을 목격하고 체험한 그에게 4·3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혼자 있으면 별 생각이 다 나. 매일 공상에 빠지니까 집중이 안돼 공부를 못했어. 국민학교 때는 주판도 잘하고, 계산도 잘 했는데 4·3 이후에는 숫자 감각이 둔해졌어. 지렁이가 잘려도 움직이듯이 사람도 총을 맞으면 숨이 팍하고 끊어지지 않아. 그걸 눈으로 봤으니까 말이요.”
지난 1989년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이 “사회에 대한 원망이 없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그런 시대에 태어난 저의 운명으로 생각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그런 것은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4·3을 생각하면 살 수가 없다. 내 팔자라고 해서 산다”고 했다. 그러나 배·보상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보상 없는 명예회복은 안됩니다. 교통사고가 나도 배·보상을 하는데 사람을 죽여놓고 대통령의 사과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얼마가 되든지 배·보상은 해야 됩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