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6 21:06
수정 : 2019.05.1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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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아버지 조사천씨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꼬마 상주. 조사천씨는 5월21일 계엄군에게 총을 맞고 숨졌지만 카빈 희생자로 분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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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희생자들 폭도로 조작한 보안사
시민들 카빈 무장 하루 전 사망 3명
M16 총에 죽었는데, 카빈 희생자로
“80%이상 폭도 만들어야” 전화 들어
“폭도끼리 교전 결론 뒤 희생자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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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아버지 조사천씨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꼬마 상주. 조사천씨는 5월21일 계엄군에게 총을 맞고 숨졌지만 카빈 희생자로 분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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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총상 사망자 가운데 카빈소총에 맞은 희생자는 사체 검안 한명뿐”이었다는 당시 검안의 문형배 전 원광대 교수의 최초 증언은 ‘시민군들이 쏜 총에 시민들이 희생됐다’는 보수단체의 5·18 왜곡 주장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의 보안사는 M16 희생자를 줄이고 카빈소총 희생자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문 전 교수는 보안사 505보안대가 당시 각계 인사 11명으로 꾸려진 사체검안위원회가 작성한 사체검안서 등을 바탕으로 폭도·비폭도를 분류하면서 카빈소총 희생자를 늘렸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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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계엄군들이 카빈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 그동안 계엄군들은 M16 소총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인식됐던 것과 다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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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 조사 자료를 보면, 당시 문 전 교수와 박규호 전 조선대 의대 교수 등 의사 2명과 목사 등도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2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런 과정에서 사체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 카빈 사망자(시민군 간 오인사격 희생자로 조작)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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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검안위원회 최초 자료인 사체검안서엔 조사천씨가 총상 사망자로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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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서 작성한 조사천씨의 검시 서류엔 카빈 희생자로 분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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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희생자에 대한 조작이 이뤄졌다. 김만두·김재수·김재화씨는 5월20일 밤 광주역 앞에서 제3공수가 최초로 쏜 M16 총을 맞고 사망한 희생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카빈소총 희생자로 버젓이 분류돼 있다.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 등을 털어 실탄이 든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시점은 5월21일 오후 1시 금남로 계엄군 집단발포 이후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시민들이 카빈소총으로 무장하기도 전에 카빈소총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꼬마 상주’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영정의 주인공 조사천씨도 M16 희생자에서 카빈소총 사망자로 둔갑됐을 가능성이 높다. 문 전 교수 등 2명이 작성한 조사천씨의 사체검안서(80. 6. 2)엔 실혈성 및 혈흉(피고임)으로 사망했고 선행 요인은 총상으로만 적혀 있다. 하지만 검찰이 작성한 5·18 관련 사망자 검시 기록엔 조씨가 카빈소총 사망자로 돼 있다. 조씨의 검찰 검시 기록 참여인은 최아무개 의사로 돼 있다.
광주교도소 인근 사망자를 집중적으로 카빈소총 희생자로 왜곡한 점도 눈에 띈다. 검찰이 최초로 작성한 카빈 희생자 28명 가운데 고규석·임은택·서만오씨 등 3명이 광주교도소 발포 때 카빈소총 사망자로 나온다. 이 가운데 서만오씨는 5월21일 옛 광주교도소 앞에서 살해된 뒤 임시매장됐다가 가족들이 그 주검을 찾아내 군 희생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 날 옛 광주교도소 앞에서 희생당한 고규석·임은택씨는 3공수부대원들에게 총을 맞고 사망했다. 한차에 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이승을(79)씨는 2017년 10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군인들이 군용차를 가로로 세워 길을 막고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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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일 목사가 1996년 검찰 조사에서 보안대 폭도 분류의 문제점을 지적한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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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보안대가 5·18 희생자를 폭도와 카빈 희생자로 조작하는 데 조직적으로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사체검안위원회에 참여했던 김재일 목사는 1996년 검찰 조사에서 “시체 사진과 검안서를 놓고 폭도, 비폭도 분류를 할 때 사실을 놓고 분류하지 않고 보안과장이 전화를 우리 있는 데서 받으면서 ‘우(위의 지역말)에서 (상급자 서울보안사) 80% 이상을 폭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전화받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5·18 연구자 안길정 박사는 “폭도끼리 교전이라고 한 뒤 그 사망자가 너무 적으니까 사체검안위원회를 통해 카빈소총 사망자를 늘리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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