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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1.29 10:30 수정 : 2007.01.30 17:24

흑방의 단원. 1966년 9월12일 어린 홍위병이 중국 북쪽 끝에 있는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리의 목에 걸린 간판이 그를 ‘흑방의 단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흑방은 마오쩌둥이 새로이 선포한 문화대혁명을 방해하려 한다고 고발당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낡고 봉건적인 모든 요소들을 사회에서 쓸어버리기 위해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모인 10대 소녀들은 홍위병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고 공격적인 편이었다. 홍위병 경험에 대한 자전적인 회고록에서 류솔라는 열한 살 때 학교에서 홍위병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걸했는지 회상하고 있다. 엄청나게 지독한 말로 가족을 공개 비난하고, 한때 지주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늙은 넝마주이를 감시하는 일을 도운 뒤에야 가입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그 늙은 여인은 류솔라가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목을 베어 자살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러한 비극은 비일비재했다. 북폴리오 제공


타파와 비판, 강제 삭발 전후의 장면. 항일 전쟁 당시 홍군의 고위 간부였고 오랜 동안 헤이룽장성을 다스린 리판우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나라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홍위병 집회에 소환당했다. 곧 집회가 있을 거라는 제보를 받은 젊은 사진기자 리전성은 헤이룽장성의 당 신문에 게재하기 위해 사태를 기록하러 갔다. 시장 리판우는 국가의 반역자일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 처럼 머리를 넘기는 오만함을 보여준다고 홍위병이 고함치는 순간 리전성은 현장에 있었다. 즉석에서 머리카락을 잘리는 수모를 당한 뒤 리판우는 잘린 머리카락이 목 아래에 쌓인 상태에서 홍위병에게 절을 강요당했다. 마오쩌둥의 사진 위에는 지방 성 정부를 비판하고 타파하라고 홍위병에게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리판우는 실제로 공직과 당내 직위를 박탈당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결백을 주장했고 1967년 또다시 수모와 박해를 당했다. 북폴리오 제공
‘공자와 그 무리’, ‘낡은 봉건질서’의 요소와 ‘반동분자’ 색출이 1966년 널리 횡행했다. 홍위병이 산둥 성 취푸의 언덕에 2000년 넘게 후손들이 보존해 온 공자의 사당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 홍위병이 본전 입구의 정교하게 조각한 대리석 기둥을 커다란 해머로 부수고 있다. 왼쪽 위에는 인민에게 ‘공자와 그 일당을 공격하라’고 촉구하는 구호가 보인다. 이 구절은 1919년 5.4운동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중국과 티베트의 사당과 사찰이 여럿 파괴된 것은 심미적인 측면에서 문화대혁명이 낳은 비극 중 하나이다. 북폴리오 제공
진정한 신봉자, 문화대혁명이 심화됨에 따라 홍위병은 ‘반동분자’를 학대하고 자신들의 ‘혁명 경험’을 공유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인민해방군 소속인 이 병사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활기로 유명해졌다. 1968년 4월16일에 찍은 이 사진에서 그는 마오쩌둥의 어록이 담긴 빨간 소책자를 꼭 쥐고 자신의 혁명적 열의에 감동한 전국의 농민들이 준 마오쩌둥 단추와 배지를 자랑스럽게 가리키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마오쩌둥 숭배, 1966년 8월부터 그 다음 해까지 대규모 홍위병 집회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열렸고, 마오쩌둥은 자금성 정문 꼭대기에서 그들을 사열했다. 1967년 5월 같은 장소에서 한 홍위병 그룹이 다 함께 마오쩌둥 수첩 첫 장에 있는 그의 사진을 펼쳐 흔들어대고 있다. 한때 홍위병이었던 류솔라의 후일 기록에 따르면 “마오쩌둥 위원장이 천안문에서 손을 흔들자 100만명의 홍위병은 마치 호르몬 반응이라도 보이듯 목놓아 울었다. 훗날 마오쩌둥이 화면에 나타나기만 해도 모두 울음을 터뜨릴 준비가 이때 이미 되어 있었다. 그는 신적인 존재였고 세계혁명의 흐름은 그의 지휘에 따라 흥하거나 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폴리오 제공
얼간이 모자, 문화대혁명 당시 공인들은 종종 얼간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모욕을 당하면서 거리를 끌려다녔다. 이 같은 광경이 비일비재하자 얼간이 모자는 시선을 끌기 위해 점점 더 커졌다. 1966년 9월에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헤이룽장성 당서기 런중이가 쓴 엄청나게 큰 얼간이 모자가 한 예다. 북폴리오 제공
예술과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당시 예술과 마오쩌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전직 여배우였던 부인 장칭은 이 시기에 문화분야를 감독했고, 소수의 이른바 ‘혁명 가극’만이 극작품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작품은 인민해방군의 예술단원들이 공연했는데, 단장이었던 린뱌오는 관료 중 마오쩌둥 부부의 가장 헌신적인 지지자 중 한 명이였다. 1967년 광저우 중앙역에서 군 예술단이 3년 전 린뱌오가 처음으로 편집한 마오쩌둥 어록이 담긴 빨간 소책자를 읽으며 무용을 공연하고 있다. 한때 ‘몽고 바이올린’이라고 불리던 얼후(중국의 근대 현악기)와 작은 피리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전통악기는 혁명 정서를 올바르게 표현할 때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북폴리오 제공
당의 노선, 문화대혁명이 쇠퇴하는데도 정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초점을 바꾸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1974년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 안 모습으로, 승객들이 모여 객차에 걸린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며 끝까지 투쟁하자”고 촉구하는 현수막 아래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린뱌오는 1971년 비밀리에 숙청당했지만 그의 죽음(소련으로 도망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전해진다)은 1972년에야 발표되었다. 정부는 실각한 장군과 공자를 연계해 린뱌오의 반동 기질과 계급투쟁 반대를 강조하려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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