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28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생각보다 젊은 신문이라고요? 한겨레보다 ‘젊은’ 1991년생 새내기 기자가 <한겨레>를 만든 몇몇 순간들을 갈무리해봤습니다.
1988년 5월15일 발행된 한겨레 창간호 50만부는 모두 매진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 “다음 중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2015년 한겨레 신입기자 시험문제 박종철 열사 사망/이한열 열사 사망/한겨레 창간호 발행/대통령 직선제 개헌
지난해 신입기자 필기전형 때 저는 시험지를 받아들고 잠시 멈칫했습니다. 현대사 퀴즈인 줄 알았는데, 한겨레 열독 검증 문제였던 것입니다! (<한겨레>, 규탄합니다!) 정답은 '한겨레 창간호 발행'입니다. 다른 선택지는 1987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한겨레신문> 창간호는 1988년 5월15일 발행됐습니다. <한겨레>는 세계 최초의 국민주 신문입니다. 2만7223명 시민들이 창간기금 50억원을 모아 만들었습니다. 지면은 엄혹한 시절 탄압받던 해직기자들이 채웠습니다. 창간특집호 50만 부는 매진됐다고 합니다.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잠시 고민한 것은 현대사에 대한 무지 때문은 아니라 믿(고 싶)습니다. 창간호가 발행된 것은 1988년이되, <한겨레신문주식회사>가 창립된 것은 1987년이었으니 말입니다.
‘한글전용 신문’에 대한 한겨레의 고집은 의도치 않은 해프닝을 낳기도 했다. 1988년 6월26일 스포츠면 직역이 어색하단 취지로 독자가 보내온 의견. 한겨레 자료사진
2. 한글을 고집하는 자의 슬픔
<한겨레>는 한국 신문 가운데 처음으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한글전용’에 대한 고집은 때때로 의도치 않은 해프닝을 낳았습니다.
2009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를 ‘아이큐84’로 잘못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숫자까지 한글로 썼으면 ‘아이큐팔십사’로 부르는 사달이 날 뻔했지요.)
한때 ‘구석차기(코너킥)’, ‘도움주기(어시스트)’, ‘튄공잡기(리바운드)’ 등 특정 분야에서 통용되는 외래어마저 ’올곧게’ 순화어로 바꾸는 탓에, “기자도 이해가 안 되는데, 누구를 위한 순화어인가”라는 안팎의 불만도 있었다는 건 비밀입니다. 정작 목요일마다 인기리에 발행되는 매거진 섹션 ESC는 왜 ‘이에스시’로 표기하지 않느냐는 독자들의 항의 아닌 항의(?)도 받았습니다.
1994~1995년 한겨레21과 씨네21이 나란히 창간됐다. 한겨레21의 창간을 알리는 한겨레 기사와 씨네21 창간호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3. 알고 보면 ‘젊은 신문’
1994~1995년, <한겨레>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영상주간지 <씨네21>을 잇따라 창간했습니다. <한겨레21>은 (한겨레보다 조금만 더 예쁜) 디자인을 자랑하고, <씨네21>은 영상 분야 대표 매체로 자리했습니다. 2014년엔 2030세대의 ‘대세’라는 <허핑턴포스트 코리아>를 설립했습니다. 한겨레는 ‘젊음’을 주도해온 신문입니다.
물론 요사이… 항간에… 한겨레가… ‘아재 신문’이라는 뜬소문(응?)이 나돌지만...
보십시오~!! 헌내기 아니고 새내기…기자는…한겨레에…열 손가락 안에 드는… 20대 기자라는 데에…무한한…영광한…뿌듯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겨레결체는 탈 네모꼴 결체로 보기에 편안한 글씨체를 지향한다.
4. ‘배달의 민족’체 이전에 ‘한겨레결체’가 있었다.
2005년 한글날을 맞아 <한겨레>는 ‘탈 네모꼴’로 만들어진 ‘한겨레결체’를 공개했습니다. 더 이상 네모틀에 꿰맞춰 글자를 납작하게 쓰지 않아도 되게 됐습니다(‘네모의 꿈’ 의문의 1패). 양재샤넬체보다는 덜 화려하고, 궁서체보다는 덜 진지해도, 견고딕체보단 친절합니다. 무엇보다 예쁩니다. ‘배달의 민족’ 글씨체가 나오기 전까진 인기가 높았는데…. 여기서 잠시, 눈물을 삼키겠습니다.
2001년 연재된 ‘심층해부 언론권력’을 비롯해, 한겨레 보도는 권력의 핵심부를 겨냥해왔다.
5. 무엇보다 한겨레의 칼끝은 권력을 향해 왔습니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정치자금을 받고 국정에 관여한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1994년부터 3년간 끈질기게 뒤쫓은 끝에 나온 특종이었습니다. 당시 청와대 수석 비서관은 <한겨레>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스물네 시간을 따라다닙니까. 신경이 쓰여서 (김현철) 눈 실핏줄이 터졌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언론 권력의 부정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2001년 ‘심층해부 언론권력’ 기획을 통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언론권력’의 친일 전력과 군사정권과의 유착을 고발했습니다. 두 신문은 <한겨레>를 상대로 수십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대법원은 “보도의 전체적인 취지가 왜곡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광고수입이 떨어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재벌 권력을 비판했습니다. 2007년 <한겨레>는 삼성에서 근무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비자금 의혹’을 끈질기게 보도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2년 넘게 <한겨레>에 대한 광고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한겨레>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 조작 및 정치공작 사건을 파헤쳤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 강조 말씀’과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린 정치 관련 글이 속속히 드러났습니다. 국민의 안보를 수호해야 할 국정원이 ‘여전히’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진 방송인 유병재 페이스북 갈무리
6. 각종 폭력과 협박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창간 초기, <한겨레>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폭력이나 협박을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1990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의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는 전경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한겨레 기자는 사진기를 뺏어버려”라고 대놓고 말하던 시절입니다.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가 파출소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보수당원과 보수단체들이 <한겨레> 사옥과 보급소에 난입하던 일도 왕왕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버이들이 종종 공덕동 사옥을 방문하십니다. 고마워요, 어버이...
7. 씻을 수 없는 오보로 고개 숙인 순간도 있었습니다.
1993년, 292명의 사망자를 낸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당시 <한겨레>는 선장 백운두씨가 살아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보도 3일 뒤, 백 선장의 사체가 인양됐습니다.
2004년, 고 김선일 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돼 피살된 것으로 알려진 다음날, <한겨레>는 김씨가 살아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다음날 1면에 사과문을 실었습니다.
8. 다시, 서른 즈음에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영광인 줄 알았는데~
줄어드는 신문부수 속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마감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우리 독자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은 맞겠지만~ 내가 떠나온 것은 아닌데~
잊히지 않게, 서른 즈음에 다시 다짐합니다. 더 정직하고, 더 정확한 신문이 되겠습니다. <한겨레> 창간기념일이자 스승의 날인 5월15일을 맞아,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의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수줍은 다짐 스윽~ 남기며 새내기 기자 이만 물러갑니다. 날카로운 비판과 채찍질 삼가지 말아주세요.
덧, 그래도 ‘한겨례’는 아닙니다. ‘한걸레’ 같은 의도적 오기도 섭섭합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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