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선생이 어느 인터뷰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인생에 무관심한 것’이라며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하셨다. 나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조금 있으면 총선이라는 정치의 계절도 닥치고 하니 이번 글을 통해 정치 얘기를 좀 해야겠다.
얼마 전 나는 어느 정치인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책 이름은 ‘대한민국 대전환’이라는 부제를 단 <배를 돌려라>다. 대한민국의 큰 밑그림을 다시 그리기 위해 대한민국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취지다. 그는 ‘비례민주주의’ 도입으로 선거개혁을 이룩해야 된다는 주장을 고집스럽게 실천해 왔던 사람이다. 그는 ‘공생, 공유, 공정사회’의 큰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런 주장과 실천을 하는 사람은 바로 녹색당의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데 내 앞에서 ‘큰 그림’ 이야기를 자꾸 하니 그림쟁이인 나로서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 이 칼럼을 통해 평소 가지고 있던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알게 모르게 정치의 한가운데 태어나고 정치를 통해 성장하고 또 정치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치적인 담론이 형성되면 옆으로, 대부분은 아래로 확산된다. 설이나 추석이면 모든 정치권이 민심을 측정하고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귀향한 가족들이 서울의 민심을 전하면 부모나 친지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기가 예사다.
택시를 타더라도 승객인 나와 기사 간에 쓸데없는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다. 내가 세월호 사건으로 만들어진 4·16재단의 이사장이라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데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승객은 이 리본을 보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경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광화문을 토요일마다 점령하는 ‘태극기 부대’는 또 어떤가? 이런 일상사에도 끊임없이 ‘작은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 이런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정치)이 하 위원장의 주장처럼 대한민국의 큰 그림을 그린다고 해결될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 예컨대 여성, 재난 피해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어린이, 노인, 비정규직, 심지어는 청년들조차 기득권자에게 크고 작은 고통과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불평등이 일상화된 위험사회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갑질’과 ‘성추행’을 보라! 그런 가해자들은 대부분 사장님들이거나 피해자의 상관들이다. 단지 젊은 사람들보다 계급이 높거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아랫사람을 깔보고 야단친다. 금력이나 권력으로 같이 사는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한 결과다.
정치란 마땅히 이 세상을 자유롭고 평등하도록, 또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들이 협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국회에서는 매일 혐오스러운 언사로 상대방 죽이기에 골몰하고 있고, 정당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대변인들이 나서 상대편 정당을 헐뜯고 상처 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심지어 광화문광장에 나와 삭발을 하고 상대방을 낙마시켰다고 표창장을 주는 희영수를 떨어 대고 있다.
어쨌든, 아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런 불량한 정치 코미디를 일상적으로 대하고 산다.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그 정치의 본바닥으로 뛰어들어가 봄직도 하다. 선거철만 되면 각 정당에서 ‘인재’를 영입한다고 난리를 치지 않는가. 특히 선거용으로 젊은 사람들을 속된 말로 ‘삐끼’ 하여 끌어다가 간판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보면 젊은 인재들은 그냥 장식용이었다는 것이 금방 판명된다. 그 후에 그들 대부분은 용도폐기 당한다.
우리는 정치의 과잉생산에 눈을 돌리지 말고 정치의 평등한 분배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 정치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이론이 위에서 언급한 하 위원장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이런 정치제도를 채택한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예컨대 네덜란드는 이런 제도로 13개 정당이 국회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 ‘동물을 위한 당’은 150명 의원 가운데 5석(전체의 3.2%)이나 얻어 당당하게 소수정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국회의원의 40%가 40대 이하라고 한다. 이렇게 해야 양당정치의 독식을 깨고 그 적폐를 막을 수 있다.
그 외에 정치를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시민단체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 것도 정치를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부와 정치를 감시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일은 훌륭한 정치의 한 방법이다. 우리 사회를 공정사회로 만드는 일은 시민들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다. 이를 위해서는 비판적인 감시자로서의 시민정신이 필요하다. 이 비판 정신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깨어 있는 시민(정신)’이고 이를 함양하는 일이야말로 바른 정치로 나가는 밑바탕이 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사상가이자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그 자체의 목적과 원리와 기준을 가진 활동으로 보고, 정치의 ‘자율성’을 제일 먼저 주창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수단이 목적에 맞추어 선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수단은 가장 확실하게 목적을 이루는 수단임을 강조했다. 정치의 자율성과 독립을 의미하는 이 원리는 그의 전 사상의 근본이 됐다. 이 정치의 자율성은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의 자율성과 더불어 근대사상의 토대를 이룬다. 이 정치의 자율성은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정치의 주권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항상 ‘정치’는 단독으로 우리와 관계없이 저 멀리 있다가 선거 때가 돌아오면 잠시 우리 옆에서 표를 갈구하고 그럴듯한 공약과 구호를 남발한다. 선거가 끝나면 그것으로 우리와의 관계는 깨끗이 끊어진다. 명사로서의 ‘정치’는 액자 속에 가만히 갇혀 있는 그림처럼 가끔가다 힐끗 보며 ‘응, 저기 정치가 걸려 있구먼…’ 하고 스쳐 지나간다.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그런 죽은 정치여서는 안 된다. 이를 끄집어내어 전동 킥보드라도 태워 움직이게 해야 한다.
스웨덴의 툰베리를 보라! 그는 지금 만 16살이다. 그는 어른들을 향해, 심지어는 미국의 트럼프나 기성 정치인을 향해 거침없이 야단을 친다. “지금 지구의 생명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바로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야단을 치는 중이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렇게 거침없이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정치다. 그래서 결론은 “젊은이들이여 정치하라”다.
김정헌 ㅣ 화가, 4·16재단 이사장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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