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불법촬영, 편파수사…. 분노한 여성의 목소리가 거리를 메웁니다.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진정한 성평등을 위한 인식 개선과 사회·정책적 진보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쏟아집니다. <한겨레>는 ‘2018년 한국’만큼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낙태죄 폐지운동을 벌이는 아르헨티나 여성들, 여성 할례 폐지를 위해 분투하는 케냐 여성들, 국제결혼 귀환 여성을 돕는 베트남 여성들, 히말라야 트레킹을 통해 자립을 모색하는 네팔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페미니즘으로 연결된 여성의 목소리로 세계지도를 새롭게 그려봅니다.
지난 6월3일 열린 ‘#니 우나 메노스’ 시위에 참여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낙태 합법화’를 함께 요구했다. 파울라 킨츠파터, 위키미디어코먼스
아르헨티나에 뜨거운 겨울을 선사한 건 초록색 바람이었다. 지난 8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회 앞 광장은 초록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시민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지금 당장 낙태를 합법화하라”(Aborto legal ya), “낙태는 곧 법이 될 것”(Aborto será ley)이란 구호가 울려퍼졌다.
이날은 상원이 ‘임신 14주 이내 낙태 허용’을 명시한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날이었다. 아르헨티나는 현재 강간 때문에 임신을 하거나 산모의 건강이 매우 위험할 때만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두달 전 하원은 꼬박 하루가 걸린 토론 끝에 찬성 129명, 반대 125명이란 근소한 차이로 이 법안을 가결했다. 상원에선 15시간여의 토론이 이어졌다. 의회 앞 ‘5월대로’를 마주하고 초록색과 하늘색 파도가 양쪽에서 넘실거렸다. 초록색은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하늘색은 낙태 반대 진영을 상징한다. 이날 거리에 나온 시민은 200만명에 달했다.
찬성 31명, 반대 38명, 기권 2명. 초록색 바람은 끝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나라인 이곳엔 낙태를 죄악으로 보는 가톨릭이 여전히 우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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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이 올해 유달리 탄력을 받은 건 3년 전 이곳에서 시작돼 중남미 전 대륙으로 번져나간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운동의 영향이다. ‘니 우나 메노스’는 페미사이드(여성혐오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여성살해)와 성폭력, 가정폭력에 맞서 “더 이상 단 한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다”고 외친 운동이다. <한겨레>는 2018년 그 어느 곳보다 여성의 권리와 평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이곳의 여성들은 무엇을 위해, 왜, 어떻게 싸우고 있는 걸까?
지난 6월3일 열린 ‘#니 우나 메노스’ 시위에 참여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낙태 합법화’를 함께 요구했다. 파울라 킨츠파터, 위키미디어코먼스
■ 선택권은 여성에게 있다
“낙태는 지금까지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니까요.” 배우 돌로레스 폰시는 ‘왜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했다. 그는 지난해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여성 배우들의 모임 ‘악트리세스 아르헨티나스’를 꾸렸다. 시작은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으로 모인 배우 40명이었다. 곧 500여명이 참여하는 모임으로 커졌다. 이들은 의원들을 설득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캠페인을 벌였으며, 초록색 스카프를 두르고 거리를 지켰다.
‘불의와 불평등.’ 폰시는 현실을 이렇게 정의했다. “낙태를 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요.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열악한 환경에서 수술을 받고 죽을 가능성도 높죠. 게다가 현행법은 여성만 처벌해요. ‘마치스모’(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한 법이거든요. 정부든 교회든 남성이든 누구도 여성에게 엄마가 되는 걸 강요할 순 없는데도요.”
한국처럼, 아르헨티나에서도 낙태수술은 음지를 파고들었다. 정부가 추산한 낙태 건수는 연간 35만건, 인권단체는 50만건으로 집계한다. 산모의 18%가 음성적인 낙태 수술로 사망한다. 낙태를 종교 문제가 아닌 공중보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그가 강조하는 이유다.
미완의 성과이지만 ‘미완’보다 ‘성과’에 방점이 찍힌다. 좌파건 우파건 정부는 언제나 가톨릭과 우호관계를 지속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가능했을까. 폰시는 두달여간 이어진 시민 토론에 공을 돌렸다.
“매주 화·목요일에 700여명이 모여 토론을 했어요. 하원의원들이 표결 전에 의견을 듣고자 의사, 철학자, 경제학자 등 전문가 모임을 꾸린 거죠. 경제학자는 불법 낙태수술과 그로 인한 감염 등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검토했어요. 의사는 원치 않는 아이를 가졌을 때나 낙태를 했을 때 산모가 겪는 정신적인 충격을 설명했고요.”
한국에서도 낙태 처벌 조항이 위헌 소송 중이란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빙긋 웃으며 응원을 건넸다. “여성의 몸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는 여성이죠.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요.”
2015년 6월3일, 처음 ‘니 우나 메노스’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여성들의 시위 모습. ‘니 우나 메노스’ 페이스북 갈무리
■ 죽음은 여성을 거리로 불러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많은 여성을 거리로 불러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공포와 분노가 페미니즘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2015년 아르헨티나에서도 한 소녀의 죽음이 여성들을 광장으로 이끌었다. 남자친구로부터 잔인하게 살해된 14살 소녀 치아라 파에스다. 살해 당시 그는 아이를 밴 몸이었다.
같은 해 6월 “단 한명도 잃을 수 없다”는 외침이 시작됐다. 처음엔 언론인, 예술인, 활동가를 중심으로 연대를 꾸렸지만 20명에서 20만명까지 시위 인원이 늘어나는 덴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는 여성이 죽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였죠.” ‘니 우나 메노스’ 연대의 마리나 마리아시는 설명했다. 이듬해 10월에는 여성을 향한 폭력에 맞서 검은 옷을 입고 파업하는 ‘검은 수요일’ 시위도 벌였다.
“매년 6월3일에 시위를 해요. 처음엔 물리적인 폭력 근절만 요구했는데 최근엔 범위를 넓혔어요.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여성정책 예산이 많이 줄었거든요. 올해는 낙태 합법화를 주장했고요.”
살인사건을 일일이 기록해가며 페미사이드 통계를 처음 만든 단체도 있다. ‘만남의 집’(La casa del encuentro)의 대표 아다 리코는 또박또박 숫자를 읊었다.
“이곳에선 30시간마다 여성 1명이 죽어요. 그중 90%는 연인, 가족 등 가까운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하죠.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살해당한 여성은 2679명, 그로 인해 엄마를 잃은 아이들은 2161명입니다.”
페미사이드는 모든 나라에서 발생한다. “여성을 소유할 수 있고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많은 남성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리코 대표는 설명했다.
자원봉사자 60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피해여성 상담뿐만 아니라 정책 마련에도 힘을 모은다. 단체가 제안해 만들어진 주요 법안은 △남성이 여성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가하다 살해하면 종신형을 받는 법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면 양육권을 뺏는 법 △페미사이드로 죽은 여성의 자녀가 21살 이하일 때 정부가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법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통과까지 10년이 걸린 법도 있다. 의회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모든 의원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회기가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통과 비결은 집요함이었다.
다음 목표는 ‘아직 죽지 않은’ 여성을 위한 법이다. 여성이 계속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정부가 3년 동안 연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통과된 법들은 모두 여성이 죽은 뒤에야 필요한 거였죠. 이제는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도울 수 있는 법을 제안하려고요. 더 중요하죠.” 리코 대표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지난 6월3일 열린 ‘#니 우나 메노스’ 시위에 참여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낙태 합법화’를 함께 요구했다. 파울라 킨츠파터, 위키미디어코먼스
■ ‘마치스모 카르텔’을 부숴라
아르헨티나의 여성들이 싸우는 대상은 사실 남성 개개인이 아니다. 공기처럼, 보이진 않지만 어디에나 있는 ‘마치스모’와의 싸움이다.
“저희가 제안한 법안에 대해 토론할 때 의원들로부터 ‘마치스모’가 불쑥 튀어나와요. 여성을 위한 법은 만드는데 왜 남성을 위한 법은 없냐는 식이죠. 지표는 그럴 때 쓰입니다. 사실 남성이 그렇게 많이 살해당했다는 통계는 없거든요.” 리코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숫자는 힘이 세다. ‘만남의 집’이 제안했던 세 법안은 모두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살인 동기도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성은 ‘마치스모’에 기반해 여성을 살해하지만, 여성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설명이다.
‘니 우나 메노스’ 연대의 마리아시도 ‘마치스모’ 때문에 수사와 처벌이 제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판사도 언론도 ‘마치스타’(남성우월주의자)예요. 어떤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뒤 죽었는데 ‘클럽을 좋아하는 여성’이란 식의 기사 제목이 나왔어요. 가해자 남성도 클럽에 있었는데 마치 여성만 잘못했단 투로요. 사법부도 비슷해요. 만약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면 그 여성이 입고 있던 속옷 색까지 조사해요. 그 반대일 땐 잘 알아보지도 않아요. 남성을 보호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요.”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니 우나 메노스’의 두번째 목표는 경제적인 차별을 없애는 일이다. “요즘엔 경제가 어려워 여성부터 잘리곤 해요. 여기서도 여성은 임금이 더 적고, 승진이 잘 안되고, 비정규직이 많죠.” 마리아시는 출산휴가 때문에 혼나는 여성 직장인의 모습을 그려넣은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낙태 합법화를 두고 찬반 시위가 벌어지는 의회 앞에선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는 초록색 스카프,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주황색 스카프, 페미니즘 운동을 상징하는 보라색 스카프를 나란히 걸어놓고 판매하는 이들이 있다. 박다해 기자
■ 미풍은 태풍이 되어 돌아온다
초록색 바람은 분명 미풍은 아니었다. 내년에 새 의회가 꾸려지면 낙태 허용 법안은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운동가들은 “이제 낙태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에 다음엔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며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민심은 이미 낙태 합법화 쪽으로 기울었다. 현지 언론 <클라린>이 지난 4월 보도한 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 단위로 조사를 시행했을 때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는 비율은 51%, 반대는 43%였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주요 대도시 중심으로 대상을 한정할 경우 찬성 62%, 반대 20%로 차이가 더 벌어진다. 게다가 의원 후보의 성비를 50 대 50으로 구성해야만 하는 법이 이미 통과됐기 때문에 다음 의회부턴 여성 의원의 수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표결에선, 상하원 모두 여성 의원의 찬성 비율이 높았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낙태 허용을 반대하는 쪽이지만, 만약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승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더 세찬 초록색 바람이 불어오기를,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고대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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