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0.05 10:24
수정 : 2018.10.0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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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포카라에 있는 수공예 업체 여성기술개발조직(WSDO)에서 직원들이 네팔 전통 방식으로 직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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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지도를 잇다] 네팔 ‘여성기술개발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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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포카라에 있는 수공예 업체 여성기술개발조직(WSDO)에서 직원들이 네팔 전통 방식으로 직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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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포카라에 있는 ‘여성기술개발조직’(WSDO: Women’s Skills Development Organization)은 ‘세 자매 트레킹’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가난한 네팔 여성들이 스스로 돈 벌어 자립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는 ‘세 자매 트레킹’과 같지만, 방법은 다르다. ‘세 자매’가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이 있던 가이드라는 직업의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면, 개발조직은 포카라 여성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현재 포카라에서 여성 600명을 고용하는 이곳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유럽 등 전 세계에 네팔 전통 방식으로 핸드백, 장난감 등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지난달 13일 이곳을 찾았더니, 수공예품 작업장이라기보다 작지만 효율적인 공장에 가까웠다. 실을 염색하는 것부터 전통 베틀로 직조하고, 재봉틀이나 뜨개 방식으로 모양을 만들어나간 뒤 마지막에 포장하기까지 세분화된 분업 형태로 12단계에 걸쳐 완제품을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오랫동안 숙련된 노동으로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었다. 경력 23년의 수니다 알레(47)는 모든 제품의 ‘지퍼’를 달고 확인하는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처음엔 “식당 심부름하는 단순한 일 말고 내 기술을 갖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 문을 두드렸다. 수니다는 “그저 배워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제품을 만들다 보니 더 열심히 만들게 됐고, 또 많이 팔리면 보람도 더 컸다”며 그렇게 23년이 금세 흘렀다고 말했다.
염색·베틀·재봉·뜨개 12단계 수작업
핸드백 등 네팔 전통 수공예품 수출
‘지퍼’ 담당 경력 23년 수니다 알레
“식당 심부름 아닌 내 기술 가져 보람”
중국·인도와 가격경쟁 어려움에도
‘베이비 가방’ 성공 수출기반 다져
여성 600명 고용돼 수익 나눠
람칼리 “일하고 싶다면 누구나 가능”
1975년 처음 단체가 생겼을 때부터 영리 활동을 하진 않았다. 애초엔 정부 지원을 받아 전국 곳곳에 임신과 출산, 위생 지식과 관련된 교육을 관리하는 구실을 했다. 현재 개발조직의 대표를 맡고 있는 람칼리 카드카(63)는 관련 공무원으로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1999년 본격적으로 ‘돈 벌기’에 나섰다. 람칼리는 “여성들이 집에서 살림을 하더라도 아플 때 병원에라도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성들이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고 설명했다. 네팔의 고산지대에 있는 마을은 양을 기르고 양털을 직접 깎아 옷을 만들어 입었다. 대부분 집집마다 베틀이 있었다. 람칼리는 “학교에 가지 않아 글을 모르는 여성도 많은데, 익숙하면서 빨리 배워서 돈을 벌 수 있는 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것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공예품은 이미 글로벌 경쟁이 치열했다. 가까운 인도와 중국에서도 이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인기를 끌 만한 수공예품을 많이 만들어 팔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싼값은 상대하기 버거웠다. 위기에 봉착한 개발조직을 살린 건 네팔 학생들이 학교 갈 때 어깨에 가로질러 메는 책가방 형태인 ‘베이비 가방’이었다. 15살 때부터 친구 따라 이곳에 와서 25년째 근무하고 있는 시타 타파(40)는 ‘베이비 가방’에 큰 애착을 드러냈다. “당시 이마저 안 팔리면 망하는 상황이었는데, 베이비 가방 덕분에 우리의 이름을 알리고 수출도 더 많이 하게 돼서 ‘진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제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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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기술개발조직 람칼리 카드카(오른쪽) 대표가 직원과 함께 이들의 인기작 ‘베이비 가방’을 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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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조직은 이른바 ‘B급 여성 노동자’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출산과 육아를 하는 여성과 장애인 여성은 어느 나라에서든 여성 노동력 중에서도 부차적인 노동자다. 그러나 이곳에선 외면받지 않았다. 람칼리는 “여기서 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는 직원도 아주 많았다. 꼭 출근하지 않아도 집에서 물건을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서 보내주면 거기에 맞게 계산을 해줬다”고 말했다. 개발조직의 전체 직원 중 장애인도 33명에 이른다. 이날 만난 주 마야(44)는 휠체어를 타는 지체 장애인이다. 그러나 16년 경력으로 주변에 6~7명의 교육생을 앉혀둔 채 뜨개질을 가르치고 있었다. 주는 “매일 7시간 반씩 일한다”며 “이동하는 것 외에 다른 동료들보다 특별한 점은 없다”고 말했다. 람칼리는 “설령 장애가 있더라도 잘할 수 있는 분야가 하나씩은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배워서 일하고 싶다고 오면 뭘 잘할 수 있는지 우선 파악한 다음 교육을 시킨다”고 말했다.
개발조직은 외부의 기부나 후원 등을 받지 않는다. 오직 물건을 팔아 남긴 수익으로 사세를 확장해왔다. 포카라에 본사 한곳과 지점 네곳에서 600명의 직원이 흩어져 근무하고 있다. 람칼리는 “누구한테도 거저를 바라지 않고 고생해서 만든 제품들이 전 세계에 나가고 그렇게 번 이익을 네팔 여성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게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포카라/글·사진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이 손으로 이 발로 먹고 살았지요
‘손과 발’은 개인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평생 손과 발로 밥벌이를 해온 이들은 그 이력을 숨기기 어렵기 마련이다. 해발고도 5000m 이상의 산을 1년에 거뜬히 10여차례는 오르는 가이드의 발과 자신만의 디테일을 부여한 가방을 만들어온 장인의 손을 담고 싶었다. 경력 16년차 가이드 마나 쿤와르(37)는 “발에 굳은살이 심하다”며 사진 찍으려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내젓다가도 “이 발 때문에 그동안 먹고살았다”며 활짝 웃으며 발바닥을 보여줬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으로 16년째 색색의 실을 꼬아 가방을 만드는 장인 주 마야(44)는 주변 교육생들 앞에서 쑥쓰러운 듯 두 손을 모아 보였다. 뭉툭한 손가락은 수천수만 갈래의 실을 팽팽하게 죄어온 힘이 느껴지는 동시에 수없이 만져온 그 실 때문에 지문이 있는 손끝은 반질반질하다.
포카라/글·사진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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