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05 09:55
수정 : 2019.01.06 11:31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④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산나와 장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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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산나와 장로들>, 1610년, 캔버스에 유채, 독일 바이센슈타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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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안 돼요. 도와주세요!”
10살, 7살 두 딸이 기계적으로 합창을 한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어떤 아저씨가 자기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해야 하는 말이란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받은 교육인 것 같은데, 듣는 순간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갑자기 그동안 ‘제대로 거절의 표현을 안 해서 피해를 입은 것’이라며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했던 사회의 손가락질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의식이 아이들에게 ‘확실히 표현하라’는 교육으로 이어진 것만 같은 느낌에 당황스러웠다.
효과도 미지수다. 그 위급한 상황에 ‘싫어요. 안 돼요’ 같은 말이 나올까. 오히려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여성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진짜 효과 있는’ 생존요령을 따로 은밀히 교육받는다. 성폭력을 당할 것 같을 때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치면 아무도 안 나오니까 대신 이렇게 외치라고. “불이야!”
아이들에게 조근조근 설명했다. “어떤 아저씨가 널 강제로 끌고 갈 때 사람들이 안 도와줄 수 있어. 자기가 이 아이의 아빠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내버려두거든.” 대신 아이에게 끌려가더라도 주변 가게의 물건들을 다 부수고 돌멩이로 유리창을 깨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가게 주인이 배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아이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막을 거라고.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주다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며 서글퍼졌다. 왜 나는 아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이야기를 ‘생존기술’이라며 말해줘야 하는 걸까. 이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자아이들에게 ‘만지지 마세요’를 말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남자아이들에게 ‘허락 없이 만지면 안 돼’라고 가르치는 게 먼저 아닐까. 가해자가 없어지면 피해자도 없어지게 마련이니까.
성폭력에 고통받는 여성은 그림에도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의 <수산나와 장로들>도 그중 하나다. 구약성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물인 수산나는 어느 날 목욕을 하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존경받는 원로’인 두 장로가 나타나 다짜고짜 성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수산나가 외간 남자와 간통하는 걸 목격했다며 거짓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수산나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한다. 그림 속 그녀는 온몸으로 공포와 절망, 수치와 혐오를 표현하고 있다. 젠틸레스키는 이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녀가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이었던 자에게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수산나는 이후 장로들의 거짓 고발 때문에 간통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후일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예언자가 된 다니엘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고, 두 장로도 죄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나 성경과 달랐다. 가해자를 고소한 젠틸레스키는 피해자였음에도 ‘위증방지용’이라며 엄지손톱을 조이는 고문을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고, 결국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지만 가해자는 실제 징역을 살지 않았다. 남성 가해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여성들이 아무리 성폭력을 피하려 노력하고 피해를 입증해도 고통은 온전히 피해자의 것이다.
언젠가 늦은 귀갓길 으슥한 골목길을 걸어간 적이 있다. 지쳐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앞서가던 여성의 걸음이 유독 빨라지고 다급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게끔 일부러 큰 소리로 통화를 했다. 그때야 그녀의 걸음 속도가 잦아들었다.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 더 이상 이런 불필요한 에너지를 일상에서 쏟으며 살고 싶지 않다. 몇년 뒤 사춘기를 맞이할 아이에게 ‘일찍 귀가하라’고 닦달할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괴로울 따름이다.
작가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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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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