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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6 11:21 수정 : 2019.10.26 11:23

루카스 크라나흐, <에덴동산>(부분), 1530년, 목판에 유채, 빈미술사박물관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2. 루카스 크라나흐 ‘에덴동산’

루카스 크라나흐, <에덴동산>(부분), 1530년, 목판에 유채, 빈미술사박물관

초등학생 시절, 집에서 사촌들과 비디오테이프로 한 영화를 봤다. 내용은 머릿속에서 거의 휘발됐고, 단지 한 장면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추락 위기의 엘리베이터에서 주인공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엘리베이터 구석에 서서 무섭다며 못 가겠다고 울며 뻗대었다. 이러다 주인공까지 추락할 상황. 이때 같이 보던 사촌 동생이 소리쳤다. “아, 나는 답답이가 제일 싫어! 꼭 답답이 캐릭터는 여자더라!”

그 시절 영화나 드라마, 만화 속 여성의 이미지는 유약하고 수동적이며 남자 주인공에게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잦았다. 오래전부터 대대손손 여성은 늘 그런 식으로 등장해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온갖 재앙을 불러오는 불행이 담긴 상자를 열었던 판도라는 여성이다. 성경에도 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 먹어 인류에게 원죄의 굴레를 씌운 이브가 그 주인공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최초의 남성과 여성이다. 그들은 지상낙원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창조신은 그들에게 모든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도록 허락했으나, 선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의 과일 단 하나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며 금지했다. 하지만 이브는 ‘선악과를 먹으면 신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과일을 먹었고, 그것도 모자라 아담에게도 권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은 그들을 가차 없이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더 나아가 신은 이브에게 산통을 겪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저주를, 아담에겐 스스로 일해 먹고살아야 하는 저주를 내린다. 이쯤 되면 이브는 경박한 호기심과 허영심 때문에 남성의 신세까지 망친 팜 파탈의 원조라 할 만하다.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1472~1553)도 이 유명한 이야기를 그림에 담았다. 선악과 나무 아래 아담과 이브가 서 있다. 그림 속 이브는 손을 뒤로한 채 몰래 뱀에게 선악과를 건네받고 있다. 이미 선악과 하나는 아담을 꼬여내 넘겨준 상태다. 반면 아담은 마치 순진해서 이브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처럼 머리를 긁적인다. 이 같은 묘사는 남성을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피해자로 표현한다. 교회에 숱하게 걸렸던 이런 그림들로 인해 이브의 후예인 여성들은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지 않았을까. 실제로 사도 바울은 이브를 근거로 들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위를 강조했고, 여성을 교육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여성들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명했다. 반면 아담의 후예인 남성에게는 ‘항상 여자의 유혹을 조심하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그래서였을까? 크라나흐는 아예 이브에게 선악과를 건네는 뱀도 가슴 달린 여성으로 그렸다.

그러고 보니, 의도적으로 접근해 남성을 ‘유혹’하고 금품을 우려내는 여자를 ‘꽃뱀’이라 일컫는 것도 우연치고는 기막히다. 교활한 꽃뱀에게 당한 남성은 언제나 안타까운 희생자다. 그런데 꽃뱀 등장 이전, 우리 사회엔 여성을 등쳐먹는 남성인 ‘제비’가 있었다. 하지만 제비에게 당한 여성은 딱한 피해자가 아니라 ‘망신을 자초한 우둔한 여자’로 조롱당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피해를 입어도 비웃음거리가 되는 여성의 현실. 원죄를 짊어진 이브 이래, 누적된 세월만큼이나 강화된 여성 혐오의 그림자가 이렇게도 깊다. 그래서 한 남성 개그맨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렇게도 당당하게 말했나 보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고.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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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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