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③미군에 보낸 일본인 편지
맥아더 사령관에게 쓴 일본인 편지
점령 비판보다 호의 내용이 다수
오사카 근처 거주하는 한 여성
“부인들은 미국 지배 기쁘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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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27일 일본 왕 히로히토가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방문해 맥아더 미군사령관을 만난 장면. 서양식 예복 차림의 일왕은 경직된 모습인 데 비해 황갈색 셔츠 차림의 맥아더는 두 손을 뒤춤에 받친 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본 쪽은 이 사진의 사용을 꺼렸지만, 당시 미군은 각 신문사에 사진 게재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아사히신문> 등에 일제히 실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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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29일 일본의 모든 신문 1면에 일제히 실린 히로히토 일왕의 모습. 군복 대신에 양복을 입은 일왕의 새 이미지는 전쟁 책임을 가려버리는 데 도움을 줬다. <아사히신문> 피디에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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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인근에 사는 오우치 하나코는 1945년 12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식량 배급을 늘려주면 천황제를 폐지해도 대중들은 환호할 것”이라고 썼다.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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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하나코가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의 겉봉투.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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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하나코가 쓴 편지 원본 사진. 정용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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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에게 일본인들은 평균적으로 매일 약 1천통의 편지를 보냈다. 각계각층이 보낸 이 편지들의 주요 내용은 미군사령부의 점령정책과 맥아더 사령관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관에 보존돼 있는 일본인들의 편지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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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대 폐지론이 최소한 반반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갇힌 일 군인
“우리 외면 천황 보며 후회의 눈물” “천황이 전쟁범죄 무죄라고?” 일본 전후 정치의 출발점에서 천황제의 존폐가 가지는 중요성을 반영하듯 점령 초기 점령군에 배달된 일본인들의 편지에서 천황제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신문 여론조사는 천황제 유지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편지들은 시기별로 천황제에 대한 비판이 더 많은 시기도 있고, 비판과 지지가 비슷하게 나올 때가 많았다. 비판의 주된 논거는 천황제가 군국주의의 수단이자 온상이라는 것이었고, 노골적인 천황제 지지도 적지 않았지만 천황제를 철폐하기보다는 히로히토의 퇴위 정도로 그치거나 천황을 비정치화해 존속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위의 편지는 천황제 존폐 논란에서 전쟁책임 문제, 점령통치를 위한 현실적 필요성, 전후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상징성 따위의 논거를 비웃기라도 하듯 쌀만 준다면 천황은 없어도 상관없고, 그 점과 관련해서는 점령군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 방에 정리해버린다. 황실에 대한 사소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국화의 터부’가 지배적인 오늘날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허용될 리 없고, 참으로 놀라운 발언이다. 천황제 문제는 당시 일본의 전쟁책임을 둘러싼 논의에서 핵심적 사안이었다. 아래 편지를 보자. “천황은 모든 전쟁범죄로부터 무죄라고 한다. 왜 그런가? 그는 그의 신하들이 그의 명령은 지상명령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그들의 의무를 수행했고, 또 국가의 승리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결과 전범으로 차례차례 사형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까? A급 전범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민족의 아버지로서 해외에서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C급 전범들을 구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런 동정적 태도를 취할 때만 일본국 헌법이 유지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천황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후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한 일본 군인이 고향 지바(千葉)에 살던 아내에게 보낸 1947년 10월의 편지는 B, C급 전범은 천황의 지상명령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며 그들을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천황을 비난했지만 사실은 천황의 전쟁책임 면책이 일본 국민, 일본 사회 전체의 면책을 주장할 수 있는 심리적 토양을 제공했음을 잘 보여준다. 천황이 면책되자 전쟁책임 문제에 대한 기준이 군국주의나 비민주적 가치에 대한 비난으로 설정되지 않고, 일본 국민 사이에서 전쟁으로 이익을 본 자들에 대한 비난과 자기비판의 결여로 나타났으며, 평화를 유린한 죄와 침략행위에 의한 가해 인식을 희박하게 만들어버렸다. 즉, 일본인의 전쟁책임에 대한 인식이 지배자는 가해자, 국민은 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에 의해 지배되었고, 일본 국민 사이에서 ‘피해자론’의 확산은 일본의 타민족 침략과 식민지화의 가담자로서 일본 국민의 책임에 대한 자각을 봉쇄해버렸다. 오우치 하나코가 자기를 지칭할 때 썼던 ‘전재녀’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쟁으로 피해를 본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였으나 전후 일본이 져야 할 전쟁책임 문제라는 맥락에서 보면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 편지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의 결여와 책임 회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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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 선언을 발표한 이른바 ‘옥음방송’을 듣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 사진 <점령과 개혁>(아메미야 쇼이치 지음, 유지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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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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