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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0 18:07 수정 : 2019.12.11 02:38

[박병수 논설위원의 직격인터뷰] 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박사

일제 실인원 200만명, 연인원으론 780만 강제동원 추산
죽창 들고 강제동원에 저항도…탄광·공사장이 가장 열악
정부 보상 2차례 실시, 액수 적고 못 받은 피해자도 많아

2012년 첫 대법 판결 뒤 6년 동안 정부 뒷짐만 지고 방관
정부 책임감 갖고 나서서 일본의 태도 변화 이끌어내야
문희상 ‘1+1+α’는 한-일 갈등 막자는 미봉책…해법 안돼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가 한-일 갈등의 핵심 현안으로 떠올랐다. 문제 해결을 위해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일 기업과 일반인의 자발적 기금으로 위로금을 주는 이른바 ‘1+1+알파(α)’안을 내놓고 추진 중이다. 과연 강제동원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온 정혜경(59)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을 만나 물었다.

정 연구위원은 “먼저 정부가 나서서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진상 규명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중단된 피해 지원 접수도 재개해야 한다”며 “이렇게 책임 있는 자세로 나서야 일본도 ‘무조건 모른 척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의장의 ‘1+1+알파’에 대해선 “역사 문제를 한-일 관계 측면에서만 보고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역대 정부가 모두 이렇게 미봉책으로 접근했으니까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인터뷰는 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일제시대 강제징용 문제 전문가 정혜경 박사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직격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19.12.5
―우선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강제동원, 강제징용, 강제노역이 있는데 어떤 게 정확한가?

“강제동원은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된 용어다. 강제로 끌려가는 과정에서부터 강제노동을 하게 된 것까지 모든 피해를 포괄한 용어다. 징용은 끌려갔다는 뜻에서 많이 쓰였다. 해방 이후 여기에 ‘강제’라는 말이 붙었다. 강제노역은 범위가 노동 현장으로 축소된 의미가 있다. 강제동원이 포괄적인 표현이다.”

―얼마나 끌려갔나?

“일제는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인력·물자·자금 등 3가지를 동원한다. 인력은 연인원 780만명이다. 군인·군속 27만명, 노무자 753만명이다. 위안부는 빠진 수치다. 연인원이니까 한 사람이 2~3번씩 간 것도 포함된다. 그럼 중복은 빼고 실인원은 몇명이냐. 그건 정확히 확인된 게 없다. 학계에서는 20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어떤 방법으로 강제동원을 했나?

“기업이 모집하는 방식, 관에서 알선하는 방식, 징용령에 따른 징용, 이렇게 3가지 방식이 있었다. 초기에는 모집과 관 알선을 많이 했다. 그런데 갈수록 모집, 관 알선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남편이 갔는데 생활비 송금을 안 해주니 굶어 죽게 생겼다느니, 아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 안 진다느니, 그런 항의가 빈발했다. 동원하러 가면 사람들이 낫을 들고 죽창 들고 경찰하고 대치하는 일도 생겼다. 그래서 나중엔 일본 정부가 징용 대상을 확대한 뒤 징용하게 된다.”

―강제동원은 합법적인 것이었나?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강제노동 금지 협약’을 1929년에 만든다. 일본은 1932년 비준했다. 스스로 비준한 국제협약도 어긴 것이다. 당시 끌려간 곳은 탄광, 군수공장, 공사장, 비행장, 항만, 제철소, 조선소 같은 곳이다. 남양군도와 만주엔 집단농장도 있었다. 농사를 지어 무수알코올 같은 원료를 군에 납품했다. 가장 많이 간 곳은 탄광이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어떤 상태였나?

“가장 열악한 곳이 탄광과 토목·건축 공사장이다. 원래 일본의 탄광은 죄수노동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노무관리가 거칠었다. 일반 공장은 상대적으로 근로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근로조건은 직종이나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비교적 괜찮은 조건에서 일한 분들도 있다. 탄광도 오래된 곳은 갱도가 좁고 조건이 열악했다. 규슈엔 특히 군함도 같은 해저탄광도 있고 작업이 매우 힘들었다. 반면 사할린은 근대 채탄시설도 갖춰져 있을 정도로 비교적 양호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는 허용이 안 되고 의무만 부여됐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어느 자료에도 ‘퇴사’란 표현이 없다. ‘도주’만 있을 뿐이고, 어디서나 도주자에겐 가혹했다.”

―한-일 간 민족차별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과거 조선인을 부렸던 경험이 있는 곳에서 차별이 심했고, 처음인 곳에선 차별이 적었다. 또 조선인 집단거주지가 가까운 곳에선 차별이 적은 편이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선 차별이 심했다.”

―정부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무상 3억, 유상 2억달러를 받고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겐 인색했는데.

“1970년대에 처음 보상했는데 사망자·행불자 8500여명에게만 30만원씩 줬다. 노무현 정부 때 또 이 문제가 불거지니까 위로금을 다시 지급했는데, 사망자·행불자 2000만원, 부상자 300만~2000만원이었다. 생존자는 의료지원금으로 1년에 80만원을 받는다. 모두 7만2000여명이 6000억여원을 받았다. 그런데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일제가 외국으로만 끌고 간 게 아니다. 국내 동원도 있었다. 예컨대 충청도 사람이 제주도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되는 식이다. 연인원 650만명쯤 되는데, 모두 제외됐다. 피해 신청도 까다로웠다. 그래서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안 받고 말겠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청 기간도 2008년 9월부터 2014년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한시적으로 운영하고 종료했다. 신청자가 급증해 재정 부담이 커지는 걸 우려해 소극 행정을 한 것이다. 강제동원 명부는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피해자가 추가로 확인되지만 이젠 신청할 수도 없다.”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급전직하인데.

“원래 이 판결은 2012년 5월에 대법원에서 처음 난 것이다. 그것이 고법으로 내려갔다가 이번에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와 확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부터 그동안 6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정부는 뭐 했냐’고 물어야 한다. 정부가 진즉 나서서 이렇게 논란이 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정부가 어떻게 했어야 하나?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는 위안부 문제로 한-일이 대립할 때 ‘돈은 우리가 줄 테니 너희는 사과하라’ 이렇게 당당히 나섰다. 그러니까 일본도 ‘아 우리도 뭔가 해야 하겠구나’ 하고 압박감을 크게 느꼈다고 한다. 당시는 그렇게 우리가 일본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잃었다. 많은 분들이 일본은 왜 독일처럼 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건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도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1953년 ‘야드바셈’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거기에서 유대인 학살, 강제노동에 관한 것을 조사했다. 그렇게 해서 자료가 축적되니까 1990년대 미국 유대인들이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 정부까지 나서게 되고 그 결과 독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 재단을 만드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게 독일의 ‘기억·책임·미래재단’이다. 대신 피해자들은 모두 소송을 취하했다. 이 재단에선 생존자에게 300만원 정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주로 나치 피해 등에 대한 교육·문화사업을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독일 국민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안 된 것인가?

“우리가 ‘피해자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성엔 진상 규명 의지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되면 우리 권리가 뭔지도 자연히 알게 된다. 또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재발 방지 의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피해자성이 없었던 것 아닐 것이다. 애초엔 세월호 가족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단체를 만들고 청원도 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됐다. 정부에서 가만히 있으라며 못 하게 한 것이다. 나서면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그러니까 피해자들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졌다. ‘우리 아버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세요’ 하고 물어볼 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재일동포들이 이분들을 모셔다가 소송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무슨 일을 겪었는지 관심을 가질 기회를 놓치고, 바로 소송해서 돈을 받아야지 하는 단계로 가버린 것이다. 이건 정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아버지 어디 갔는지 아세요’ 하고 물으면 조사도 해주고 또 ‘당신은 이런 권리가 있다’고 알려주고,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진상 규명도 하고 권리도 찾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까지 가는 것인데, 이게 다 엉켜버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피해자성 회복을 위해선 진상 규명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이건 정부가 나서야 한다. 강제동원 자료는 대부분 가해자인 일본에 있다. 이들 자료를 받아와야 하는데, 그건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실 소속으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다. 나중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로 바뀌어 2015년 12월 문 닫을 때까지 11년간 존속했지만, 피해자 신고 접수 처리 등 민원업무도 겸하는 바람에 충분한 진상 조사를 못 했다. 위원회 같은 기구를 다시 가동해, 진상 규명도 하고 지원금 제도도 운영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일본도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구나. 문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겠구나’라며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일본 정부는 기업에 보상금 지급을 막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기업에 아무 지침을 안 주는 것만으로도 일은 훨씬 잘 풀릴 수 있다.”

―지금 분위기에선 일본이 자료 제공에 협조 안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강제동원 관련 1차 자료는 대부분 일본이 생산한 자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료가 일본에만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일본에 연합군 포로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영국에도 자료가 있다. 국제적십자사가 있는 스위스에도 있다. 또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자료를 소각도 못 하고 땅에 묻고 도망갔는데, 그걸 얼마 전 중국 정부가 발굴했다.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끌려갔던 조선인 병사 1만여명 자료는 러시아에 있다. 또 개인적으로 이들 자료를 수집하고 추적한 분들도 있다. 이런 자료들부터 확보해가며 시작할 수 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1+1+알파’를 내놓았다. 한국과 일본 기업, 국민의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위로금을 주는 방안인데.

“이 제안에는 중요한 규정이 있다. 기금으로 돈을 받으면 다시는 권리 행사를 못 하는 것이다. 일본이 6월 한국 정부가 제안한 ‘1+1’안은 거부하면서, 문 의장 안은 환영하는 핵심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피해자 사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이 제안의 의도는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막겠다는 것이다. 역사 문제를 외교정책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역대 정권이 이렇게 미봉책으로 접근했으니까 아직 해결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말하면서도 실제 소송한 사람들의 의사도 묻지 않았다. 이렇게 시혜를 베풀 듯이 하면서 한-일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여기에 동의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론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suh@hani.co.kr

■ 정혜경 박사는 누구?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2005년부터 11년 동안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조사과장으로 실무를 담당한 전문가다. 당시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 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작업 등에 참여했다. 강제동원과 관련해 <터널의 끝을 향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남긴 대일 역사문제 해법 찾기> 등 단행본을 10여권 출간했고 논문도 40여편 발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 역사 전공자였다. 199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일제하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연구: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도교수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강제동원을 알아야 한다’며 권유했고 이후 일본에서 활동가들이 피해자들을 만나러 국내에 오면 나에게 안내를 맡겼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1995년부터 일본의 활동가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인터뷰했다.

올여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미화한 ‘반일종족주의’가 논란이 됐을 때는 반론에 적극 나섰다. 그는 “반일종족주의를 본격 반박하는 반론서를 곧 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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