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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온몸으로 제 생명의 일부를 덜어내 새집을 지어낸다. 이런 이유로, 쥘 미슐레는 새집을 새 자체라고까지 쓰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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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25. 크리스토프 아그리콜라, 나카무라 히로시, 새와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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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온몸으로 제 생명의 일부를 덜어내 새집을 지어낸다. 이런 이유로, 쥘 미슐레는 새집을 새 자체라고까지 쓰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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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거닐다 보면 문득 반갑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우듬지 근처에 놓인, 둥근 모양을 한, 까만 가지들의 덩어리는 특히나 반갑다. 새 둥지는 우리처럼 새들도 삶이라는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환기해준다.
새집 덕택에 새와 우리 사이는 갑자기 가까워진다. 짝짓기와 출산, 안락과 안온이라는 필요가, 이 지구에서 목숨을 받아 분투하며 살아가는 꼴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찾아들면, 저 파충류의 후손들과 우리 포유류의 후손들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험상궂은 날씨라도 찾아오면, 둘의 차이는 더 줄어들고 동병상련의 정감은 한층 배가된다.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거나 북극 한파가 세상을 점령할 때, 우리도 새들처럼 각자의 둥지를 찾아가 웅크린다. 이때는 지상의 모든 동물이 “자기의 내부로 수축하고, 은둔하고, 웅크리고, 스스로를 숨기고 감춘다.”(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옮김, ‘공간의 시학’, 동문선)
한마디로 모두가 안쪽으로 피난하는데,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안’은 은신처다. 궂은 날, 은신처는 지상의 뭇 동물을 하나로 묶어준다. 오소리의 굴과 새의 둥지와 우리 집의 따뜻한 방안은 잠시간이지만 같은 장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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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의 둥지와 새알’ 일러스트, 생물다양성 유산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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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은신처들의 단순성이 이때 드러나는데, 이 단순성의 상징은 단연 새집이다. 지구의 기록자였던 화가 반 고흐가 어느 날 산책길에서 발견하고는, 초가집을 연상했던 굴뚝새의 집.
모든 새집은 그 형태가 극히 단순하다. 하지만 실은 오랜 고투를 감추고 있다. 아기 새들이 태어나 자라는 자리인 이 따뜻한 집을 짓는 이는 대개는 어미 새다.
공사가 시작되면 어미 새의 가슴 근육은 망치를 대신하고, 가슴 깃털은 건축재가 된다. 속이 둥글게 파인 집의 벽을, 어미 새는 가슴팍으로 계속 압력을 가하며 축조한다. 또한 가슴 깃털을 뽑아 바닥에 까는데, 집의 난방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새들은 온몸으로 제 생명의 일부를 덜어내 새집을 지어낸다. 이런 이유로, 쥘 미슐레는 새집을 새 자체라고까지 쓰고 있다.
“새집은 바로 새 자체다……새의 고통이라고까지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집이라는 결과는 새의 가슴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된 누름으로써만 얻어진 것이다.”
새집은 “가슴으로, 심장으로, 틀림없이 호흡의 혼란과 아마도 심장의 빠른 박동을 일으키는 가운데, 수천 번이나”(쥘 미슐레, ‘새’,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에서 재인용) 짓눌러 이 세상에 나온다고 미슐레는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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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홍방울새와 관박새, 크리스토프 아그리콜라(Christoph Ludwig Agricola, 1667~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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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헝클어뜨리는 맹렬한 어미 새의 노동과 새집의 온기와 둥근 형태, 그리고 아기 새가 느낄 안락은 각기 다른 것들이 아니다. 새를 사랑했던 독일 화가 크리스토프 아그리콜라(Christoph Ludwig Agricola, 1667~1719)도 미슐레와 같은 통찰을 했던 걸까? 그의 작품 ‘큰홍방울새와 관박새’(A Greater Redpoll And A Crested Tit)의 주제는 어미 새의 모성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잠재적 공격자(관박새)를 화폭에 등장시켰다. 집의 온기와 그 가치는 집 밖의 잠재적 적대성이 강화한다는 인식이 화폭의 배면에 깔려 있다.
바슐라르라면, 큰홍방울새가 지키고 있는 이 집이야말로 어린 시절 우리가 자랐던 집의 원형이라고 말할 것이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우리들의 집은 세계 속에 있는 새집”이다. 인간도 처음엔 알처럼 품속에 안긴 채로 자기 삶을 시작했다. 종일토록 잠만 자던 그 시절엔, 보호받음이 곧 삶이었다. “존재는 안락으로 시작”되었고, 그때 우리는 “세계의 적대성을 알지” 못했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세계의 적대성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된 후, 냉혹한 세계에 부딪혀 참혹히 깨져 본 후, 우리가 다시 찾는 것도 이런 온기 어린 집이다. 아니, 다시 찾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는 ‘온기 어린 집’이라는 이데아에 늘 끌려다니면서, 우리 자신의 거처에 이 이데아를 구축하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박 사장의 넓고 깨끗한 집과 ‘기생충 가족’이 사는 추레한 반지하 집 모두, 그 외피를 벗겨보면 저 홍방울새의 집이라는 원형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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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 다실, 나카무라 히로시, 사진 후지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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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 다실, 나카무라 히로시, 사진 후지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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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나카무라 히로시(中村 宏, Nakamura Hiroshi, 1932~)는 이 원형을 찾아내 아예 ‘인간화’해버렸다. 트리 하우스(Tree House) 제작자 코바야시 다카시(Kobayashi Takashi)의 제안으로 일본 아타미 시의 300년 된 녹나무 위에 지은 ‘새 둥지 다실’(2014)이 바로 그 작품이다.
아쉽게도 이 조그만 다실은, 집은 아니다. 즉,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잠시간이지만 우리를 새의 세계로 옮겨주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연을 소외시키지 않는 자유가 어쩐지 이곳에서는 우리의 것이 될 것만 같다.
이 다실은 번다함이나 돈 같은 세속의 족쇄에 묶인 우리 자신의 부자유 역시 여실히 직시하게 해 준다. 더 단순하게, 더 소박하게 살 수는 없을까? 당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다실 앞에서 하게 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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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 다실, 나카무라 히로시, 사진 후지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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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처럼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게 하소서,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새 둥지 다실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단순함이나 소박함이라는 가치는 우리 시대에는 급진성을 띤다. 이 가치를 지키려는 자는 이 시대에서는 투사가 되어야만 한다. 시대정신이 이 가치를 통째로 억압하고 있어서 이 가치를 따르는 것이 곧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고, 정반대로 이 가치를 내던지고 시대정신을 따를수록, 내적 충일의 행복과는 멀어지는 대신 자연을 파괴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과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새 둥지 다실 앞에서 우리는 시대에 맞서고 시대를 넘어서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 같은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어미 큰홍방울새는 목숨을 걸고 아기 새의 집을 지키지만, 우리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가치를 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동물 미술관> 저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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