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양일모 지음/태학사(2008) 중국 역사에서 외부의 이질적인 문화나 이론이 체계적으로 수용된 사례는 근대(청말)의 일만은 아니었다. 중국은 위·진 시대 인도의 불교를 수용한 경험이 있고, 명말청초에 이르러 천주교와 서학을 수용한 전례가 있었다. 다만, 중국의 화이론적 입장은 외래의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결코 외래의 갑작스러운 수용이 아니라 그들 내부, 역사 속에 이미 존재하던 것, 전례가 있었던 것을 새롭게 재인식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불교가 중국에 전래하는 과정에 등장한 “노자가 이적의 땅으로 건너가 부처가 되었다”는 이른바 ‘노자부처설’이다. 이런 설은 단지 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진(西晉) 시대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같은 텍스트로 정착하기도 했다. 불교가 중국화하기 위해 도교의 개념을 응용하려던 것이 반대로 도교의 성인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불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명말청초 중국으로 건너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선택한 문화번역 전략 역시 중국적 전통 개념을 응용하여 그리스도교의 ‘God’을 ‘천주’로 수용하기 쉽게 변용한 결과가 천주교(天主敎)라는 한역(漢譯)이다. 좋게 말하면 외부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변용한 결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견강부회의 명분론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중국의 모습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외부로부터 새롭고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데 자신의 역사와 문화 내부에서 사상적 자원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야말로 중국의 무서움이자 저력이다. 오랫동안 중국적인 것, 중화는 보편이며, 자기 완결적 특수성을 지닌 문명이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외부세계에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중국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유교를 근본으로 서학의 발달한 기술과 물질문명을 수용하려는 시도였던 양무운동의 이론적 기초였던 ‘중체서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량치차오(1873~1929)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서구의 의회제도와 비견될 수 있는 제도가 이미 중국에 존재했으며 이를 고대문헌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대 의회의 고찰’(古議院考)에서 “인민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인민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예기>의 구절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현자라고 한 뒤에 그를 살펴보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한 뒤에 그를 살핀다”고 하는 <맹자> ‘양혜왕’ 하편의 말을 통해 중국 내부에 이미 의회 사상의 기초가 있었으며 의회 제도야말로 중국의 고대 성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옌푸(嚴復, 1853~1921)는 중국 청말 민국 초기의 사상가로 1912년 국립 베이징 대학의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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