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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5 06:00 수정 : 2019.02.16 16:33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⑤ 메디치 가문의 비주얼 프로파간다

현실의 정치지도자나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군주나 인물의 행적과 삶에 빗대어 이해하고 묘사하려는 시도는 중세 유럽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구약의 인물 및 사건들과 오늘날의 인물 및 사건들 간의 일종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강조하였던 신학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비너스의 탄생’ ‘프리마베라’와 같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산드로 보티첼리는 1475년경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작품을 완성하였다.(그림 1)

그림 1.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경, 우피치미술관.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피로에 지쳐 사색하듯 턱을 괴고 있는 요셉 아래로 예수를 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보인다. 계단 위에서 이제 막 한 박사가 예수의 발을 감싸고 경배를 드리고 있는 중이다. 그 아래로는 갓 태어난 구세주를 알현하려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고 가운데에는 붉은색 망토를 두른 두번째 박사가 무릎을 꿇고 있다. 그 옆에는 세번째 박사가 흰옷을 입고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은 채 두번째 박사를 바라보고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와 메디치 가문

당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소(小) 교회당에서 이 그림을 보았던 사람들은 여기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단숨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계단 위 첫번째 박사의 얼굴은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권력 중심으로 끌어올린 코시모의 것이었고, 두번째 박사의 얼굴은 코시모의 아들이었던 피에로, 세번째 박사의 얼굴은 그 동생인 조반니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림이 그려지던 무렵 이들은 이미 모두 사망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군중들 속에서도 우리는 쉽게 메디치가의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왼쪽 그룹의 사람들 앞에서, 마치 이들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인물은 바로 이 작품이 그려지던 무렵 피렌체를 이끌며 그 위명을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떨치던 소위 ‘위대한 자’ 로렌초를 묘사하고 있으며, 오른쪽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 붉은 줄이 들어간 검은 옷을 입은 채 다소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인물은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이다. 여기에는 메디치가의 가신들과 주변의 다른 인물들도 그려져 있으며, 재미있게도 보티첼리 자신도 오른쪽 그룹 맨 아래 구석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젊은이로 등장한다.

이 작품을 보티첼리에게 그리게 한 것은 당시 메디치가의 가신 그룹에 속했던 가스파레 델 라마이다.(오른쪽 그룹 윗부분에 관객을 바라보는 듯한 흰머리의 노인으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메디치 가문은 원래 세명의 박사에 대한 숭배의식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후원해왔다. 메디치 가문은 ‘동방박사회’(Compagnia de’ Magi)라는 일종의 공익조직에 속해 있었다. 피에로가 그의 아들 로렌초의 세례일로 고른 것도 동방박사 축일이었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그림을 단지 메디치가가 갖고 있는 동방박사에 대한 각별한 경외심이나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그림에서 보티첼리가 성경의 사건과 동시대의 인물들을 한 장면 안에 배치시켜 마치 예수의 탄생이 지금 이 순간 피렌체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처럼 묘사한 것은 이 위대한 화가가 1500년의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지도자나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군주나 인물의 행적과 삶에 빗대어 이해하고 묘사하려는 시도는 중세 유럽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구약의 인물 및 사건들과 오늘날의 인물 및 사건들 간의 일종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강조하였던 신학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신을 온 우주의 군주이자 세상 모든 권력의 근원이며 참된 지도자의 원형으로 묘사하던 당시의 지적 맥락에서 아기예수의 알현은 흔히 당시의 종교 및 정치지도자들의 신심과 덕을 묘사하기 위하여 흔히 동원되던 모티브였다. 그것은 지도자로서 자신이 세계의 진정한 군주인 예수의 탄생의 의미와 그에 깃든 가르침을, 마치 그 자리에서 보고 들었던 듯 느끼고 깨닫고 새기고 간직하며 따르겠다는 일종의 서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보티첼리의 그림에는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누리고 있는 지도자적 지위와 권력을 현시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보티첼리의 그림에서는 금권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피렌체를 쥐락펴락하던 한 가문의 자의식과 그에 아부하려는 가신의 공명심이 한데 엉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자의식이 표현된 것은 보티첼리의 그림이 처음이 아니었다. 약 20년 전쯤 파올로 우첼로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회랑에 노아의 홍수를 모티브로 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그림 2)

그림 2. 파올로 우첼로의 프레스코화 ‘대홍수’, 1440년 이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회랑.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대홍수가 남긴 혼란을 배경으로 오른쪽에 노인의 모습을 한 노아가 마치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자처럼 축복의 자세를 취한 채 서 있다. 우첼로는 이 노인의 모습 안에서 코시모 메디치의 모습을 구현해놓았다. 메디치 가문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종교적 사고와 상징, 예술의 힘을 빌려 프로파간다를 한 예는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렌체 공화정은 이상적이었나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중세의 억압적 질서에 맞선 자유의 보루로서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그려왔다. 특히 르네상스의 꽃으로 불리는 피렌체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이러한 ‘상식’에 크게 영향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 공화정을 지나치게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 피렌체는 대부분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계급과 계층 간의 차별로부터 비롯된 심각한 내부갈등에 시달렸다. 직물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소수의 가문들이 대길드를 중심으로 정치생활을 좌우하였으며 소길드에 속한, 별로 성공하지 못한 수공업자나 다른 직업군의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킬 수단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길드에 가입하지 못한 하층노동자들의 경우 아예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막혀 있었다. 수공업자와 하층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1378년에 일으킨 치옴피의 반란은 피렌체라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부와 권리의 불평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인문주의자이면서 메디치 가문과 가까운 관계였던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피렌체 찬가’(Laudatio florentine urbis)에서 “세상 어디에도 피렌체보다 모든 사람에게 더 동등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곳은 없습니다. 즉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이보다 더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썼을 때, 이는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상층들의 다분히 주관적인 시각, 혹은 피렌체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원하고 있던 정치체제의 이상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을지 몰라도 객관적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이전까지 피렌체를 지배해온 알비치가를 누르고 1434년 피렌체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손에 쥔 메디치가는 공화국의 현실을 더욱 뒤틀어놓았다. 메디치가는 합법의 외관 뒤에서 자기 사람을 요소에 심어서 이들을 통해 정부를 통치하였다. 당시 피렌체 정부의 위원이나 관리들은 자격을 갖춘 시민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뽑히도록 되어 있었다. 붉은 가죽주머니에 피선출 자격을 갖춘 시민들의 이름을 적은 슬립들을 넣어두고 위원회나 관직에 결원이 생기면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그 위에 적힌 사람에게 직을 맡기는 것이 규칙이었다. 메디치가는 어느 위원회나 관직에 해당되는 주머니에 어느 이름이 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관리인 ‘아코피아토리’(Accoppiatori)들을 이용하여 메디치가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선출되게 하였다.

메디치가의 지배가 전혀 인기가 없는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1469년부터 메디치 가문을 이끌게 된 로렌초는 문사와 예술가의 후원자로서, 피렌체의 공공행사를 위해 아낌없이 주머니를 여는 부유한 시민으로서 큰 신망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렌초가 1479년 거둔 외교적 성공은 그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평등과 파벌 싸움으로 찢겨진 이러한 도시가 누릴 수 있었던 번영의 시간은 짧았다. 몰락은 서서히 준비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왔다.

1494년 9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였다. 일단 이탈리아에 발을 들이자 샤를은 나폴리로 향하는 도시들에 성문을 열고 자신을 맞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샤를의 진격이 싱거울 정도로 저항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대인들은 이를 ‘분필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샤를이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단지 분필로 군대 주둔지를 표시하는 것뿐이었다는 의미이다. 많은 도시들이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요새와 성의 열쇠를 샤를에게 바쳤다. 그 안에는 피렌체도 있었다. 굴욕적인 항복 소식에 피렌체인들은 자괴감과 모멸감에 빠졌으며, 그 분노는 저항 한번 하지 않고 개처럼 무릎을 꿇은 메디치가로 향했다. 자유 때문이든 다른 원한 때문이든 메디치가의 지배에 반감을 품은 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1494년 11월8일 피에로 메디치는 ‘자유’를 부르짖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피렌체로부터 가족과 함께 도주하였다. 그의 목에는 2000두카트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 채였다. 그리고 피렌체의 지배는 페라라 출신 도미니크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후 피렌체의 운명은 점점 더 피렌체인들의 손을 떠나 강대국의 의지에 내맡겨졌다. 미래에 대한 회의감과 절망,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피렌체를 그리는 희망이 한데 뒤엉켜 도시를 휩쓸었다. 다음 글은 그 시대의 절망과 희망을 보여주는 보티첼리의 또 다른 그림에서 시작한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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