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⑥ 사보나롤라의 성공과 몰락
사보나롤라의 몰락과 더불어 소데리니의 실각은 마키아벨리가 너무나 부패한 사회는 말이나 법의 힘만으로 정화될 수 없으며, 과단성과 추진력, 때로 법도 무시할 줄 아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근본부터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권력의 담론이 그렇게 탄생하였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리고 약 25년이 흐른 1500년경, 보티첼리는 <십자가형의 상징>(Crocifissione simbolica)이라는 작품을 완성하였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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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산드로 보티첼리, ‘십자가형의 상징’, 1500년경.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포그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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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두 장면이 겹쳐 있다. 앞쪽 장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보인다. 그 아래에는 붉은 망토를 두른 마리아 막달레나가 십자가에 매달려 울부짖고 있다. 오른쪽에는 날개 달린 천사가 어떤 동물을 한 손으로 잡고 채찍으로 치고 있다. 뒤쪽 장면에 등장하는 도시는 가운데 솟아 있는 두오모에서도 알 수 있듯 피렌체다. 왼쪽 하늘 모퉁이에는 성경을 든 신이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폭우와 뇌전을 품은 검은 구름이 밀려나고 있다. 보존상태가 나빠 잘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구름 속 곳곳에서 악마들이 화살을 쏘고 있고 십자가가 그려진 방패를 든 천사들이 이를 막고 있다.
피렌체의 참회
지난 글에서 살펴본 <동방박사의 경배>와 비교할 때 전체 그림의 톤은 매우 어둡다. 이 그림 어디에서도 앞의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보이는 자신감과 낙관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뒤쪽 장면에 담긴 것은 피렌체를 짓누르는 고통에 대한 암울함과 공포이다. 그러한 감정은 피렌체 하늘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검은 구름과 그 안에 그려진 악마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구름이 피렌체를 감싸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신과 그를 보좌하는 천사들의 힘 때문이다. 피렌체가 절망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지 아니면 검은 구름을 밀어내고 밝은 희망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지는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앞쪽 장면에서 붉은 망토를 두른 마리아 막달레나는 회개라는 메시지와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천사에 의한 채찍질 역시 징벌과 참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천사의 손에 매달려 얻어맞고 있는 동물이다. 자세히 보면 이것은 당시 피렌체의 문장에 등장하는 사자이다. 여기에서 전체 그림의 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참회, 그것도 피렌체의 참회이다.
전체 그림의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피렌체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과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은 신의 자비와 은총에 있다. 이제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이 죄에 대한 신의 징벌임을 깨닫고 처절하게 참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글에서 금권과 협잡으로 피렌체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던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과 더불어 종말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글의 맨 마지막에 짧게 이야기했듯이 메디치 가문의 축출이 가져온 권력의 공백은 페라라 출신의 도미니크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에 의해 메워졌다. 사보나롤라의 성공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피렌체의 굴복으로부터 메디치 가문의 축출로 번져가는 정치적 혼돈에서 사보나롤라는 현재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을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프레임을 제시했다. 절망 속에 빠져 있던 피렌체인들은 그를 예언자로서 환영하고 그의 말과 비전에 열광했다.
사보나롤라는 공화주의와 신정정치라는 두 이상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당장 피렌체에 닥친 위기가 신의 징벌이라고 설교했다. 신의 징벌을 부른 것은 사치와 방탕에 몸을 맡겨온 피렌체 시민들과 그들을 향락에 밀어놓고 온갖 악행으로 권세를 누려온 메디치 가문이며, 샤를 8세의 군대는 그를 벌하고 피렌체인들을 원래의 올바름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보내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사보나롤라는 일반시민이 시정에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한편으로 타락한 피렌체의 습속을 개혁하기 위한 투쟁(그 안에는 동성연애를 근절하기 위한 법도 포함되었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거듭하여 장신구, 화장품, 거울, ‘음담’과 ‘패설’을 담은 보카치오의 책이나 고전 저자들의 시가처럼 소위 시민들의 건강한 정신을 해치는 ‘사치와 향락의 도구들’을 한데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 가운데 1497년 2월7일의 화염은 특히나 컸다.
물론 메디치를 향수하는 일파부터 일개 수도사가 누리는 인기와 권력을 못마땅해하는 시민들까지, 사보나롤라의 힘이 자라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볼 수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사보나롤라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었다.(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경탄해 마지않는 체사레 보르자는 그의 혼외자식이다.) 노회한 교황에게는 자신이 조직한 반프랑스동맹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 사보나롤라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의 강력한 개혁의 목소리 역시 결코 달갑지 않았다. 몇차례 경고를 보낸 후 그는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소환하였으며, 그가 이에 응하지 않자 1497년 5월12일 파문하였다.
사보나롤라의 몰락
사보나롤라도 자신에 대한 공격을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영향력은 줄어가기 시작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혁명과 개혁의 지도자들이 경험했듯, 그에게 한때 열광하던 시민들도 개혁이 요구하는 변화와 희생에 서서히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어려운 시기가 닥치자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498년 5월23일 아침, 사보나롤라는 그를 따르던 다른 두 명의 수도사와 함께 화형주에 매달렸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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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작자 미상, ‘사보나롤라의 처형’, 1650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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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시대의 위대한 화가들의 생애에 대해 기록을 남긴 조르조 바사리는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장신구와 책이 불타던 1497년 2월의 그날, 보티첼리 스스로 고대의 신화를 그린 자신의 작품들을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옛 기록들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사리의 기록에서 <십자가형의 상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만큼은 얻을 수 있다. 회개와 참회, 피렌체의 구원이라는 그림 안의 이미지들은 보티첼리 스스로 겪었던 시대의 변화와 자신의 생각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적지 않은 피렌체인들은 보티첼리가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변화를 경험했을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4년 통치는 그가 화형주에서 생을 마감한 뒤에도 피렌체인들의 마음속에 긴 여운을 남겼다. 어떤 이들은 사보나롤라를 사기꾼으로서, 어떤 이들은 그를 선지자로서 기억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심각하게 부패한 사회를 바꾸어 놓으려면 무엇보다도 강제로 그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끌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스물아홉 되던 해에 일어났던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돌이켜보면서, 힘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준비가 되지 않은 지도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키아벨리가 강력한 힘에 의한 개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물론 사보나롤라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이 외교 관리로 일했던 소데리니 정부의 좌절 역시 그에게 같은 교훈을 주었다. 사보나롤라 체제가 무너지고 들어선 공화정부는 1502년 정부의 종신직 수반으로서 피에로 소데리니(1450~1522)를 뽑았다. 부유한 유력가문 출신이라는 자신의 배경과 상관없이 소데리니는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을 공화국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공평무사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정치인은 되지 못했다. 소데리니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데 실망한 부유시민들과 도시귀족층은 그에게 미온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1512년 소데리니는 스페인과 결탁한 메디치 가문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소데리니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반대파에게 쫓겨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피렌체는 스페인 군과 함께 돌아온 메디치 가문의 지배로 돌아갔다. 마키아벨리의 공직 경력에도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사보나롤라의 몰락과 더불어 소데리니의 실각은 마키아벨리가 너무나 부패한 사회는 말이나 법의 힘만으로 정화될 수 없으며, 과단성과 추진력, 때로 법도 무시할 줄 아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근본부터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권력의 담론이 그렇게 탄생하였다.
이로써 여섯번째 글이 끝난다. 그사이 어떤 전공을 통해 이런 분야의 지식을 얻거나 연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또다시 받았다. 언젠가 이 연재 중 한번은 그에 대해 설명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지금은 ‘그런 전공은 없다’라는 답을 드린다. 그래도 이미지와 정치를 연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몇가지 기초 자료는 있다. 다음 글부터 몇회는 이를 다루려고 한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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