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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9 06:01 수정 : 2019.03.29 19:56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⑦ 기독교 상징체계의 신체

신체는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질서를 나타내기 위한 메타포로 쓰였다.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질서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우주와 세계의 질서 전체가 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림 1. 엡스토르프 지도, 복제품. 13세기 후반. 위키미디어 코먼스
현대회화는 흔히 작가의 개성적 시각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굳이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으며, 때로는 의미를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고대 말 기독교가 서양의 지배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그 영향하에서 창조된 시각예술품, 예를 들어 교회당의 조각이나 성화, 필사본의 삽화 등의 이미지들을 그렇게 이해하고 감상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제작한 (종종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특정한 생각을 각인하기를 원했다. 그런 작품은 머리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도상들을 연구하다 보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이 많고 그러다 보면 가끔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만난다. 어느 여름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에 들러 사진을 몇장 찍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르트르가 당시에도 그다지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라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날 오전에는 한 무리의 한국 대학생들을 만났다. 골목을 돌아나오던 학생들은 그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성당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앞다투어 달려갔다. 나는 그 순간 그들의 놀라움과 감격이 ‘또 성당이야? 난 됐어…. 이제 그만 볼래’라는 짜증 어린 탄식으로 변하지 않고 인생의 소중한 순간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처음 유럽의 성당들을 마주하고 짙고 격한 감동에 휩싸이는지를 자주 보았다. 그러나 하루이틀 유명하다는 교회당들을 마주치게 되면서 그러한 감정은 곧 식상함으로 바뀐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지겨움의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무지이다.

신의 몸인 세상

나는 지난번 글의 말미에서 도상들을 읽어내는 몇가지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상은 기독교, 그것도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기독교와 관련된 도상들이다. 이러한 도상들을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신학, 형이상학, 우주론, 정치이론, 문학, 예술사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래서 앞서 나는 그런 지식을 다루는 전공이 없다고도 했다. 그래도 이들 도상들을 관류하는 상징체계의 큰 줄기는 있다. 그를 이곳저곳 더듬어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확실히 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만큼 진리인 곳도 없다.

이번 글부터 몇 편은 중세와 르네상스 기독교 사상의 상징체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간 신체의 메타포를 설명하려고 한다. 지도 한 편에서 시작하자.(그림 1) 13세기 후반 언저리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복제품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발견된 곳의 지명을 따라 엡스토르프(Ebstorf) 지도라고 불리는 이 지도의 원본은 30장의 양피지를 이어 붙인 것으로서 지름 3.6m가량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도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한가운데 네모난 곳이 예루살렘이다. 그것이 속한 땅은 아시아다. 그 아래로는 유럽(왼쪽)과 아프리카(오른쪽)가 보인다. 물론 이 지도는 상징적이다. 이런 지도를 들고 중세 유럽인들이 전쟁을 했다거나 여행을 떠났다고 믿는 사람은 없기 바란다.

독자들에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십자로 선을 그어보도록 부탁한다. 좌우로 뻗은 선을 따라가보면 양쪽 끝 각각에서 사람의 손을 발견한다. 위아래로 뻗은 선을 따라가면 위쪽 맨 끝에서는 성스러운 원광에 둘러싸인 사람의 머리를, 아래쪽 맨 끝에서는 사람의 두 발을 발견하게 된다. 왼발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운데 구멍처럼 상처가 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이 사람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렸던 신이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이 지도는 이 세상이 신의 몸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신은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원리이다. 신은 인간의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신은 이 세계를 창조했으며 이 세계를 이끌고 있다. 창조된 모든 것,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사건이 신을 표현한다. (그래서 중세의 지식인들은 이 세상을 신이 써내려간 책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는 마치 우리 마음과 머릿속의 사고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신의 몸이다. 예루살렘이 전체 지도의 가운데 있는 이유도 여기서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배꼽’이라고 일컬어졌다. 지도에서 예루살렘은 몸의 배꼽 위치에 해당된다. (중세에는 천국이 동쪽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천국이 있는 동쪽에 해당되는 아시아를 위로 올려세웠다. 그러다 보니 유럽은 왼쪽 아래로, 아프리카는 오른쪽 아래로 간다. 이 지도에서 아시아가 위로 배치된 것을 두고 어떤 강연자가 중세 유럽에는 유럽중심주의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잘못이다.)

신의 몸인 우주

그림 2. 신의 몸으로서의 우주. 힐데가르트 폰 빙엔, <신의 역사> 삽화, 비블리오테카 스타탈레 디 루카, MS 1942, fol. 9r, 1220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지도가 이해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다음 그림을 보자.(그림 2) 이 그림은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이 쓴 <신의 역사>(Liber divinorum operum), 일명 ‘스키비아스’(Scivias)라는 작품(1141~1152)의 필사본들에 등장하는 서른다섯개의 삽화 중 하나이다. 이 삽화는 힐데가르트가 꿈에서 목격한 우주창조의 신비를 나타낸다. (힐데가르트는 삽화의 맨 아래 왼쪽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감상하고 기록하는 수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삽화의 맨 위에는 노인과 청년의 머리가 겹쳐져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성부와 성자, 곧 신과 예수이다. 사실 둘은 한 몸이다. 예수의 양팔은 아래로 뻗어 내려가며 원을 그린다. 원의 아래쪽에는 두 발이 보이는데, 왼발에 역시 십자가에 못박혔던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색의 거대한 원이다. 맨 바깥쪽 붉은 원과 고동색에 가까운 원은 불을 나타낸다. 그 안쪽의 푸른빛이 도는 원은 에테르를 나타내며, 그 안쪽 물결무늬를 수놓은 듯한 원과 그 안쪽의 얇고 하얀 원, 그리고 그 안쪽의 구름과 엷은 흰색의 원은 모두 공기를 의미한다. 중세의 지식에서 불, 에테르, 공기는 흙, 물과 더불어 우주를 이루는 다섯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들 원은 우주의 움직임의 근원적 원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의 텍스트는 이 거대한 원들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마치 바퀴처럼 회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과 회전은 고대로부터 조화를 의미하는 메타포였다. 따라서 이 삽화에서 회전하는 원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들이 창조해내는 완벽한 질서를 나타낸다.

앞서 엡스토르프 지도를 이해한 독자는 이 삽화의 의미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뀐 것은 지구 대신 우주가 등장한다는 것뿐이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질서 역시 신의 사고의 표현이며 그러한 한에서 신의 몸에 비유된다.

힐데가르트의 삽화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들 원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인간의 형상이다. 힐데가르트의 텍스트는 이 존재가 모든 원들이 나타나고 가장 나중에 등장한다고 적고 있다. 이 존재는 인간이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양팔을 벌린 인간의 모습과 신의 모습 간의 유비관계는 그렇게 설명된다. 그러한 인간은 우주질서의 중심이다. 그래서 그의 위치는 한가운데이다. 그러나 삽화에 나타난 인간의 형상에는 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12세기 이후 서양에는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집약하고 있는 ‘소우주’(microcosmos)라는 학설이 크게 유행했다. 인간은 우주적 질서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적 질서이다. 삽화에서 인간의 벌린 몸이 안쪽 원을 정확히 채우고 있는 것(혹은 원이 인간의 몸을 정확히 둘러싸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고의 표현이다. 인간의 신체는 원에 구현된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실현한다. 이는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또는 신체비례도)과 유사한 포맷이다. (사족 같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완벽한 질서라는 생각이,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종교의 권위가 전복되고 인간 중심의 사상이 등장하면서 나타났다는 흔한 이야기를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12세기 사람이다.)

오늘은 여기에서 멈추겠다. 이야기한 것은 간단하다. 신체는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질서를 나타내기 위한 메타포로 쓰였다. 인간의 몸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우주와 세계의 질서 전체가 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표현되었다. 오늘 배울 것은 딱 이것 하나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생각이 현실에 옮겨지면서 거대한 건축의 기획들로 옮겨졌고, 이념의 세계에서는 풍요로운 상징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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