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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0 06:00 수정 : 2019.05.10 19:52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⑨ 성당의 웃음과 유머

밤베르크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은 관객으로 하여금 저주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며 함께 웃고 조롱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웃고 즐기는 가운데 순간 관객들은 악의 대가는 비웃음과 경멸, 공동체로부터의 배제와 고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웃음은 인간들 사이에 테두리를 긋는다. 유학이나 다른 기회를 통해서 외국인들과의 집단적인 대화에 참여해본 사람들은 누군가가 흘리는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함께 웃지 못할 때 느끼는 소외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웃음의 순간,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그 집단의 감수성과 경험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뚜렷이 구분된다. 웃지 못하는 사람은 웃음을 통해 표현된 공동체의 밖에 서게 된다.

바로 그 배제하는 힘 때문에 웃음은 파괴적이다. 그런 웃음이 약자를 향할 때 그것은 ‘이지메’(집단 따돌림)가 된다. 그런 웃음이 권력을 쥔 강자를 향할 때 그것은 저항의 무기가 된다. 웃기 위해서는 단지 입 주위와 얼굴의 근육 몇 부분을 움직이고 허파로부터 목을 통해 일정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 파괴력은 두뇌의 급격한 작동을 필요로 하는 논리적 비판이나 전신 근육을 움직여야 하는 시위보다 더 클 수 있다. 누군가를 웃음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진지한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선언과 같다. 누군가와 논쟁을 한다는 것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상대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다. 한 인간이나 집단을 타깃으로 한 웃음과 비웃음에는 그러한 존중심이 아예 없다.

저주받은 자들의 웃음

그림 1. <최후의 심판>, 밤베르크 대성당, 팀파눔, 1230년께. 위키미디어코먼스
중세를 살던 사람들도 그러한 파괴적인 웃음을 알고 있었다. 그 웃음이 향하는 대상은 종교가 가르친 바른 삶의 기준을 어긴 모든 이였다. 그런 웃음의 흔적이 독일 밤베르크 대성당 북쪽 출입구의 팀파눔(쉽게 이야기해서 성당의 출입문과 아치 사이에 있는 반원이나 삼각형의 구역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성경이나 이런저런 성자전의 아이디어를 모티브로 여러가지 장식을 새겼다)에 있는 조각에 남아 있다(그림 1). 여기에 묘사된 것은 ‘최후의 심판’이다. 가운데에는 예수가 대좌에 앉아 양손을 들고 있고, 그 아래에는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을 붙잡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는 관이 열리고 사람들이 부활하고 있다. 예수의 오른팔 쪽에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보인다. 그들은 예수를 향하고 있다. 세명의 천사가 각각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와 예수를 찌른 창, 가시면류관을 들고 예수의 옆에 서 있다.

예수의 왼팔 쪽에 서 있는 이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서 악마에 의해 한줄로 사슬에 묶여 그들이 영원히 머무르게 될 지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악마의 바로 뒤에 있는 인물은 머리에 쓴 관으로 미루어 왕임을 짐작할 수 있고, 그의 뒤로는 교황과 주교, 돈주머니를 든 수전노가 보인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25장 34절(“그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과 25장 41절(“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림 2. <최후의 심판> 중 저주받은 자들의 지옥행, 밤베르크 대성당, 팀파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희극적인 모습이다(그림 2). 악마부터가 혀를 앞으로 내민 채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 모두 얼간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세에 만들어진 최후의 심판의 묘사는 지옥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관객에게 악행에 따르는 처벌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밤베르크 대성당 팀파눔의 조각은 저주받은 자들의 지옥행을 익살스럽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웃음의 파괴적 논리를 염두에 두면 이 ‘안’ 무서운 지옥행의 묘사에 담긴 ‘무서운’ 의도가 드러난다. 밤베르크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은 관객으로 하여금 저주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며 함께 웃고 조롱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웃고 즐기는 가운데 순간 관객들은 악의 대가는 비웃음과 경멸, 공동체로부터의 배제와 고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밤베르크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저주받은 자들로서 유독 귀족과 성직자들을 부각한 이유는 이 조각을 보며 악에 대한 응보의 처절함을 되새길 관객이 주로 고위 성직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에 이 팀파눔 조각이 있는 북쪽 출입구로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드나들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문은 ‘군주의 문’이라는 의미로 ‘퓌르스텐포르탈’(F?rstenportal)이라고 불린다.

중세에 성당의 외부는 내부 못지않게 다양한 종교적 메시지로 장식되었다. 흔히 유럽의 중세 성당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외부를 지나쳐 내부의 장식만 살펴보고 떠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성당을 읽는 묘미는 내부 못지않게 외부에도 있다. 이전 글에서 중세 성당은 인간 신체의 메타포로 읽혔다고 이야기했다. 중세 성당은 동시에 노아의 방주,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배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고대 이래 인간들은 자신의 생명을 책임진 배의 외부를 장식하기를 즐겼다. 마찬가지로 중세 교회의 외면도 다양한 의미를 지닌 조각들로 꾸며졌다. 그중에서도 일반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서쪽의 출입구는 문의 장식에서 기둥과 팀파눔까지 어느 한곳 흘려서 볼 곳이 없다. 종종 그곳에는 무거운 종교적, 도덕적 교훈과 뒤섞여 관람객으로부터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이 숨어 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보겠다.

회초리를 든 여인

그림 3. <문법의 알레고리>,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출입구 왼쪽 문 아치볼트, 12세기. ⓒNikki Steninger
다음은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의 세 출입구 가운데 왼쪽 출입구의 아치장식 부분(아치볼트라고 부른다)에 새겨진 조각이다(그림 3). 이 조각은 중세의 교육체계에서 중요하게 여긴 일곱 학예 가운데 하나인 문법(grammar)을 묘사하고 있다(일곱 학예란 문법에 수사학, 논리학, 천문학, 기하학, 음악, 산수를 더한 것이다. 중세의 교육관에서 이들은 고급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로 여겨졌다. 문법과 수사학 및 논리학은 하나로 묶여, 세 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로 ‘트리비움’(trivium)이라 불렸고 나머지 네 학문은 ‘콰드리비움’(quadrivium)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우주의 질서를 탐구하고 그 안에 담긴 신의 지혜를 좇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낸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아치볼트에는 문법 외에도 음악과 천문학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서 문법을 상징하는 여인이 들고 있는 물건이다. 그것은 회초리다. 오늘날 라틴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에 치를 떤다. 중세인들에게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라틴어는 오래전부터 죽은 말, 곧 사어였다. 그런 말을 배울 방법이란 지독히 복잡한 문법과 무쌍하게 변화하는 단어를 외우고 또 외우고 지치고 지겹도록 문장을 암기하는 것뿐이다. 오늘날에는 라틴어를 읽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말도 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에 학습 과정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 지루함을 이기고 라틴어를 익히도록 중세의 스승들은 ‘사랑의 매’를 들었다. 익살스러운 장면이 그 아래에 있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에서 펼쳐진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고, 아직 앳돼 보이는 제자는 ‘사랑으로 가득 찬’ 스승의 손길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다. 독일에서 강의시간에 이 그림을 김홍도의 <서당도>와 함께 보여준 적이 있다. 학생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인간에게 있어 웃음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중세에도 인간들은 웃었는지, 어떻게, 그리고 왜 웃었는지를 물어왔다. 물론 수도사를 포함하여 중세인들도 웃었다. 그들도 우리 못지않게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웃었다. 오늘은 많은 증거 가운데 성당에 표현된 두개만을 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헨리 8세 치세의 케임브리지로 간다. 다음 글의 주제는 정치신학이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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