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04 06:02
수정 : 2019.10.04 20:50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⑭‘운명의 여신’ 포르투나, 세상의 지배자(3)
어쩌면 세상은 처음부터 악한 자들이 승리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 민주주의는 신성불가침 수준의 특권으로 보호되는 세 권력집단을 만들었다.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폭군은 모든 악의 종합이었다. 폭군은 악마에 의해 빙의된 자이며, 폭군은 적그리스도의 현현이고 강도,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다. 폭군의 지배 아래 악이 득세한다. 종교도 법도 윤리도 썩어가기 시작한다. 정의의 완전한 전복, 거꾸로 된 세상이 도래한다.
|
사진 1. 자크마르 지엘레, <새로운 레나르 이야기>의 삽화, 1289년. 파리국립도서관 소장
|
프랑스에서 13세기에 그려진 한 삽화는 그러한 세상을 표상한다.(사진 1) 삽화에서 한 여인이 커다란 바퀴를 잡고 서 있다. 이미 앞서 두 회에 걸쳐 보았던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와 그녀의 바퀴이다. 바퀴 맨 위 왕좌에는 여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여우는 성당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복장을 하고 있다. 여우의 좌우에 있는 인물들은 복장으로 보아 도미니크회 수도회의 수사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이다. 그 왼쪽 말 위에 탄 인물은 오만(orghius)을 의미한다. 그 아래에 있는 인물은 교활함(Faustes)을 나타낸다. 오른쪽을 보면 나귀에 올라탄 귀부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사기(Dame Ghille)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포르투나의 바퀴 위에 있거나 적어도 교활함처럼 바퀴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그들은 포르투나가 지배하는 세상의 승자들이다. 그에 비해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가치는 바퀴 아래쪽에 매우 비참한 몰골로 그려져 있다. 저울(정의를 의미한다)을 든 채 벌거벗겨진 채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인물은 신의(Loiautes), 그 옆의 두 인물은 자애(Carites)와 겸애(Humilites), 성찬식 때 쓰는 잔을 든 채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인물은 믿음(Fois)이다.
이 그림은 1289년 자크마르 지엘레가 쓴 <새로운 레나르 이야기>에 들어 있는 삽화이다. 여우는 고대로부터 동서를 막론하고 꾀의 상징이었다. 서양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여우에 악마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결국 여우는 중세 내내 나쁜 꾀의 동의어였다. 그런 여우를 주인공으로 하여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레나르는 바로 그 여우의 이름이다. 대개 이야기는 여우가 저지르는 성공적인 사기행각(물론 가끔 폭력도 곁들여진다)들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은 여우를 찬양하려 하였던 것이 아니라, 여우 같은 자들이 힘을 갖는 세상의 부조리를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새로운 레나르 이야기>는 그중 하나다. 삽화에서 보이듯 그 이야기에서 레나르는 세상의 지배자이다. 레나르가 당시에 가장 힘이 있던 두 기사단의 복장을 한 것은 악을 멸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할 지배자들의 타락을 비꼬는 것이다. 레나르 옆에 시종하는 자들이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던 두 종교 교단의 복장을 한 것은 교회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위한 안식처가 아니라 돈과 욕망의 화신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풍자의 절정은 포르투나가 레나르에게 이제 다시는 바퀴를 돌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삽화는 정확히 그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악이 정상에 올라선 순간 바퀴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악의 지배가 영원할 것임을 의미한다. 어쩌면 세상은 처음부터 악한 자들이 승리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지엘레의 작품과 삽화는 그러한 불만과 공포의 극단을 표현한다.
세 권력집단, 언론·대학·법조
악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대사회에서 더욱 그러하다. 개인의 자유와 시민 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서구 현대 민주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기 위해 거의 신성불가침 수준의 특권으로 보호되는 세 개의 권력집단을 만들었다. 하나는 언론이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다른 하나는 학자 집단이다. 대학의 강의실, 학자의 연구실은 학문의 자유라는 정당성에 의해 보호되어 있다. 언론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라는 가치는 보이지 않는 성채와도 같다. 그 성채 안에서 언론인과 학자들은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 그러한 만큼 이들에게는 자기성찰과 자기절제가 절실하다. 스스로 성찰하지 않는 언론, 스스로 성찰하지 않는 학문은 통제되지 않는 절대권력 못지않게 위험하다. 지식의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을 권리는 학자에게 없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한 개인, 나아가 그 가족과 친우들의 삶을 함부로 파헤칠 권리는 언론에 없다. 자기성찰과 자기절제의 경계를 넘어선 채 스스로가 최고 목적이 되어버린 언론은 의학의 일보전진을 위해 유대인과 동성연애자들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는 나치 생리학자와 근본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이를 망각할 때 선을 빙자한 악이 탄생한다.
앞의 두 집단 못지않은 세번째 특권집단은 바로 사법 전문가들, 그중에서도 검사와 판사들이다. 근대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와 떼어낼 수 없다. 법의 독립성은 신성한 것이다. 법 이외의 다른 어떠한 가치에 의해서도 휘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은 곧 법의 존립 근거이다. 그러한 법이 자기성찰과 자기절제를 하지 못할 때 선을 빙자한 악이 탄생한다. 법은 칼을 쥐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악이 된다.
|
사진 2. 귀스타브 브리옹, 자베르, <레 미제라블> 삽화, 1862년. 윤비 제공
|
여기 법을 삶의 유일한 진리로 삼고, 법만을 위해 살았던 한 사나이가 있다. 법을 어긴 자들을 사회의 적으로 증오하며 그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법 앞에 세우기 위해 세상 끝까지도 추적할 의지를 가진 사나이가 있다. 1832년 6월7일 센강에 투신하여 자살로 53년의 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직업은 파리경시청 경감이었다. 그의 이름은 자베르이다. 그는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창조한 인물이다. 화가 귀스타브 브리옹은 1862년 자베르를 다음과 같이 그렸다.(사진 2) 자베르는 엄숙하고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서 있다. 그의 머리 위 자베르라는 글자 위로 ‘앙시앵 레짐’의 성채가 보인다. 그의 오른팔 쪽에는 죄수 호송 마차가, 왼팔 쪽에는 감옥과 형구들이 그려져 있다. 발아래에는 경관들이 순찰할 때 사용하는 랜턴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법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인 ‘라 루아’(La Loi)가 쓰여 있는 판이 두 개 보인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판의 모양이다. 이 판은 종교화에 등장하는 십계명을 적은 모세의 석판을 닮았다. 자베르에게는 곧 법이 신이고 종교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브리옹은 재치있게 모세의 석판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자베르의 자살은 통제와 절제를 잃어버린 채 물신화된 법의 정의는 결국 자기모순과 자기혼란으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감으로서 그의 직업은 법의 논리에 따라 범법자를 추적하고 죄를 밝혀내 그 대가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자베르는 뛰어난 법의 집행자였다. 그러나 법이 인간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단지 도둑이기 때문에, 또는 성매매 여성이거나 고아이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어져도 마땅한 인생은 없다. 그러나 자베르는 이것을 무시했다. 그는 범법자에 대한 증오로 말미암아 법이 봉사하고 보호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를 무시했다. 법이라는 ‘신성’에 빙의된 그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검찰 안의 법물신주의
단상 하나. 수십일 동안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법의 정의는 휨 없이 실현되어야 한다. 검찰은 자기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의 검찰 수사 안에 법에 대한 물신주의가 없는가 묻는다. 주변 법조인 중 하나가 ‘조국 장관에게 특히 가혹한 것이 아니라 원래 특수부 수사가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주변을 쉴 새 없이 파고들어 압박하고 피의사실을 흘려 여론전을 유도해서라도 범죄자를 색출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자베르식의 물신주의이다. 더욱이 민주주의의 법은 자베르 시대의 절대주의의 법과 달리 법의 칼 앞에서 시민의 보호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 자기성찰과 절제 없는 법은 세련된 조직폭력이 될 수도 있다.
단상 하나 더. 밖으로 가혹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법은 가장 큰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등장하는 빌포르는 유능하고 야심 있는 법률가로서 검찰총장의 지위에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나폴레옹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력에 흠집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내버린다. 단지 한번 법의 정의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휨으로써 그는 당테스의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켰다. 뒤마는 그런 빌포르에게 가족 대부분이 죽고 스스로는 광기에 빠져버리는 결말을 설정했다. 복수를 기다려온 당테스조차 눈을 돌릴 만큼 참혹한 결말이었다. 자신의 환부를 가혹하게 도려낼 수 있는 검찰을 기대한다. 지금 검찰의 결기라면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진실한 기대이다.
앞으로 몇 회는 올바른 정치의 상징에 대해 쓰려 한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