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1 06:00
수정 : 2019.11.01 20:21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⑮ 권력의 신성함과 지배의 프로파간다
종교를 정치 이데올로기화 한 권력…‘신의 이름으로’ 권력 정당화
구와 십자가 결합한 이미지가 중세 열리는 5세기 나타나기 시작
폭력이 없는 지배는 상상할 수 없다. 고대와 중세의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묘사한 글에서 우람한 체구와 탁월한 완력은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에 대한 호메로스의 묘사가 한 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니벨룽겐의 노래나 베어울프 이야기 같은 북유럽의 작품에서도 사정은 같다.
그러나 폭력만으로 지배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며 비경제적이다. 한 집단이나 국가가 내전이나 대외전쟁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관철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노골적인 폭력행사를 통해 지배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 자원을 필요로 한다. 이뿐만 아니라 그렇게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더라도 대개는 심각한 후유증에 골머리를 앓기 마련이다.(조지 W. 부시 정부가 벌인 걸프전과 그 이후의 중동에서의 상황 전개는 그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미 지배하고 있거나 새로이 지배하려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자발적 지지를 끌어내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권력에는 왜 특정한 존재가 지배하는가, 그리고 왜 그 존재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이나 다른 초자연적인 섭리에 의한 선택이다. 신이 누군가를 다른 인간들 위에 올려세웠고 인간은 그 결정을 따라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지배하려는 측에게는 매력적이다. 권력의 신성함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에 등장한 권력집단의 수만큼 많다. 권력의 신성함에 대한 관념은 권력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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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알브레히트 뒤러, 샤를마뉴, 독일 역사박물관, 1511~15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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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손에 들린 구체의 기원
중세 초의 혼란 속에서 유럽에 최초로 대제국을 건설한 샤를마뉴의 유명한 초상 중에 알브레히트 뒤러가 대략 1511년 언저리에 그린 작품이 있다.(그림 1) 작품의 의도는 샤를마뉴의 머리 양쪽과 초상 전체를 빙 둘러 쓰인 글귀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모두를 번역할 수는 없지만, 주요한 내용은 샤를마뉴를 로마제국을 독일인들의 지배하에 둔 황제로 칭송하고, 그의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뉘른베르크(이곳은 뒤러의 고향이기도 하다)를 치켜세우는 것이다. 이 글귀에 담긴 내용을 정치사로 푸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러려면 아주 꽤나 긴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오늘은 샤를마뉴의 왼손에 들린 십자가가 달린 작은 구(큰 구슬이라고 불러도 좋다)에 이야기를 한정하려 한다. 사실 이 구는 샤를마뉴만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리우타르 전례복음서에 실린 한 삽화에 그려진 황제 오토 3세 역시 비슷한 구를 들고 있다.(그림 2) 들어 올려진 그의 팔은 좌우에 늘어선 교회의 성직자와 세속의 귀족들뿐 아니라 모두에게 이 구를 과시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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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리우타르 전례복음서 삽화, 오토 3세, 1000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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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손에 들린 이 구체의 기원은 사실 꽤 멀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원이나 구는 세계 혹은 우주의 상징으로서 정치지도자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등장한다. 바티칸박물관에 보관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나신상이 그 한 예다.(그림 3) 여기서 황제는 왼손에 승리의 여신이 올라선 구체를 들고 있다. 이는 세계의 으뜸가는 지배자로서 황제의 지위를 상징한다. 여기서 황제는 구체 위에 올라선 승리의 여신과 동일시됨으로써 종교적 위광을 부여받는다. 고대의 황제상에 들린 구와 비교하여 뒤러의 샤를마뉴나 오토 3세의 손에 들린 구가 다른 점은 승리와 영광을 나타내던 고대 종교의 상징이 십자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부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지배권의 상징으로서 구와 십자가를 결합한 이미지는 고대 세계가 멸망하고 중세가 열리는 5세기께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의미는 명백하다. 황제의 권력은 종교의 이상을 지키고 실현한다. 권력을 쥔 황제들은 그러한 성스러운 임무를 위해 신이 선택하고 축복한 존재들이다.
보편지배의 상징으로서의 구체가 반드시 황제들의 이미지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어떤 군주도 자신의 지배권을 종교의 이름으로 드높일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마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 리처드 2세의 초상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그림 4) 이 초상에도 역시 십자가가 올려세워진 구체가 등장한다. 이미지의 기본 구도나 생각은 근본적으로 앞의 예들과 다를 바가 없다. 눈에 띄는 차이라면 리처드왕이 구체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는 것뿐이다. 리처드왕의 초상은 필자가 손쉽게 고른 예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중세와 근대 초기 왕들의 이미지에서 이러한 구체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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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상, 바티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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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리처드 2세의 초상, 1390년 중반, 웨스트민스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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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이 신성과 만났을 때
오늘날 정치가가 자신의 역할을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설명하려 한다면 대개는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오늘날’이 열린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종교는 인간의 마음속에 어떤 신성한 존재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종교는 인간을 영웅주의와 사명의식으로 채우며, 때로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용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권력이 종교의 권위를 업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성을 향한 존경과 복종심의 일부라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면, 지배는 그만큼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종교를 이와 같이 전유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갈릴 것이다. 권력과 지배는 그들을 정당화해줄 이야기들이 필요하며, 그러한 이야기들은 대개 한 시대, 한 사회의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연관되어 있다. 종교가 정치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다. 여기에는 순기능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 인간이나 집단의 지배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동시에 이들 지배자들을 그러한 가치에 옭아매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들을 판단하는 규범이 되기도 한다. 중세와 근대 초에 일어난 여러 반란과 봉기에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올바른 기독교 정치지도자의 이상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현실의 지배자들에 대한 반감도 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칼과 결합한 종교는 서구의 역사에서 피를 강처럼 흐르게 만들었다. 근대 서구 정치사상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이러한 비극적 경험에 대한 반추와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립 내지 관계 재정립은 근대 국가사상의 중심 주제다. 그리고 현대에 등장한 서구 민주주의는 권력과 신성의 오랜 결합을 실질적으로 붕괴시켰다. 현대 민주주의는 권력과 지배에 오랫동안 깃들어 있던 신성함을 상당 부분 벗겨내었다. 민주주의는 크게 뛰어날 것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체제다. 그런 별반 신성하지 않은 존재들이 결정한 지도자와 그들에게 쥐여준 권력에 유난히 신성할 것이 없다.
이런 이유들로 오늘날 권력을 그리고 나타내는 데 있어 노골적인 신성화의 메타퍼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과거 권력을 묘사하는 데 이용되었던 상징의 언어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습만 바꾼 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과거는 여전히 현재 속에 살아남아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를 다루어보려 한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지난 10월4일치에 실린 ‘운명의 여신이 바퀴 돌리기를 멈춘 세상, 악이 지배한다’에서 자크마르 지엘레의 <새로운 레나르 이야기> 삽화 일부가 신문 제작 과정에서 실수로 잘려나갔습니다. 혼선을 빚은 점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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